[독일의 3국 동맹] 독일과 이탈리아가 통일된 뒤 유럽의 국제 정세에 변화가 일어났다. 독일이 유럽의 새로운 강국으로 등장하여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3국 동맹] 독일과 이탈리아가 통일된 뒤 유럽의 국제 정세에 변화가 일어났다. 독일이 유럽의 새로운 강국으로 등장하여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를 무찌르고 독일의 통일을 완성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보복을 막으려고 1873년에 제정 러시아·오스트리아와 3제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제정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발칸 방면의 진출을 둘러싸고 대립함으로써 동맹의 효과가 없어지자, 비스마르크는 이탈리아를 끌어들여 오스트리아와 함께 새로이 3국 동맹을 맺었다(1882년).

[독일의 3B 정책] 비스마르크가 수상에서 물러나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적극적인 해외 진출을 꾀하여 국제 관계를 긴장시켰다. 그는 '범게르만주의'를 내세워 발칸 방면으로의 세력 확장을 꾀하였고, 서아시아로 진출하기 위해 3B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와 같은 독일의 팽창 정책은 러시아와 프랑스를 자극시켜 두 나라가 동맹을 맺게 하였다. 

[영국의 3국 협상] 영국은 세계 제일의 공업국·무역국으로 번영을 누렸으므로 다른 나라와 동맹할 필요가 없어 오랫동안 '명예로운 고립'을 지켜 왔다. 그러나 독일의 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독일이 영국의 세력권이던 서아시아 지방까지 파고들자 위협을 받아 1904년 프랑스와 협상을 맺었다. 또 1907년에는 러시아와도 협상을 맺음으로써 영·프·러의 3국 협상이 성립되었다. 이리하여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3국 동맹과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3국 협상이 대립하는 가운데 국제 간의 긴장은 갈수록 고조되었다.

[3C 정책과 3B 정책] 3C 정책은 인도의 캘커타, 이집트의 카이로,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을 연결시키려는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이다. 또한 3B 정책은 독일의 베를린, 서아시아의 비잔티움(이스탄불)과 바그다드를 연결시키려는 독일의 동진 정책이다. 이 두 정책은 국제적 대립의 초점이 되어 제1차 세계 대전 전에 국제 긴장을 조성하였다.

[3국 협상] 3국 동맹에 대항하는 것으로 1894년에 맺어진 러·프 동맹, 1904년에 맺어진 영·프 협상 그리고 1907년에 맺어진 영·러 협상에 의해 자연히 성립되었다. 이 협상의 성립으로 독일의 우세는 끝나고 오히려 독일이 이 3국에 의해 포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