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신유박해/황사영 백서 사건

[원인]

1. 교세의 확장
1794년(정조 18년)에 우리나라 사람과 용모가 비슷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조선에 들어왔다. 주문모는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와 충청도 등지에서 전도에 힘써 약 5년 뒤에는 전국의 교인이 1만여 명이나 되었다. 

2. 벽파와 시파 간의 당쟁
1801년(순조 1년, 신유년)에 노론의 벽파가 시파를 꺾기 위해 시파와 가깝던 천주교인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였다.

[신유박해] 

이가환, 권철신, 이승훈, 정약종 등 많은 신도가 사형당하고, 정약전·약용 형제는 귀양을 갔다. 주문모 신부도 자수했다가 사형당하였고, 왕의 친척도 가리지 않고 처형해 300여 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가 순교 또는 유배되었다. 이 사건을 신유사옥 또는 신유박해라고 한다.

[황사영 백서 사건]

신유박해 때 제천의 어느 산골로 달아나 숨었던 천주교도 황사영은, 천주교 탄압을 막기위해 비단에다 글을 써서 북경에 있는 프랑스 선교부에 보내 도움을 청했다가 사전에 발각된 사건이 일어났다. 그 후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그 자신은 물론 남아 있던 천주교 신자들 대부분이 끔찍하게 처형당했는데, 이 사건이 바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그 이후 천주교는 더 이상 공개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지하로 들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