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이후의 민심/북벌론의 대두/효종의 북벌 추진/북벌 계획의 실패

[병자호란 이후의 민심]

병자호란 당시 서울과 강화도, 황해도, 평안도 등지에서는 인명과 재산의 손실이 매우 컸다. 그 후로도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 때문에 국가적으로 피해가 날로 늘어나자 조선의 민심은 울분에 가득 차고 반청 정신도 매우 높아졌다.

[북벌론의 대두]

청으로부터 당한 부끄러움을 씻기 위해 임경업과 같은 장군은 꾸준한 반청 군사 작전을 폈고, 척화파에서는 북쪽의 청나라를 정벌해 문화가 높은 명나라와 조선이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자고 주장하였다.

[효종의 북벌 추진]

1. 효종의 즉위와 북벌론자들의 득세 
북벌론은 청나라에서 봉림 대군(뒤에 효종)이 귀국해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면서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겨졌다. 이는 효종 자신이 오랫동안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서 고생한 때문도 있지만, 이때의 대신들 가운데는 김상헌과 김집, 송시열, 이완, 송준길 등 과격한 북벌론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2. 북벌을 위한 준비
효종은 북벌 계획을 추진해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훈련도감으로 하여금 군사의 양성과 무기의 정비 보완을 서두르게 하였다.

[북벌 계획의 실패] 

1. 경제적 어려움과 효종의 사망
왜란과 호란 이후 계속해서 국가 경제가 활발하지 못하고, 또한 청나라의 감시가 심해 북벌 계획은 실천에 옮길 시기를 잡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효종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결국 북벌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2. 강대국이 된 청나라
청나라는 더욱 강성해져 만주와 중국 본토를 지배하는 강국이 되었기 때문에 청에 나라에 대한 사대적 관계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대한 제국이 성립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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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론의 두 흐름]

호란 후에 일어난 북벌론에는 발상이 다른 두 개의 주장이 공존하였는데, 하나는 의리적 북벌론이고, 다른 하나는 실리적 북벌론이다.

1. 의리적 북벌론
의리적 북벌론은 명과 우리나라는 문화 국가라는 자부심 아래 오랑캐 국가로부터 받은 모욕을 씻자는 주장으로, 민족 자존을 회복하려는 애국 사상이지만 현실성은 부족하였다.

2. 실리적 북벌론
실리적 북벌론은 국제 정세의 변동을 이용해 우리의 땅이었던 만주 지역을 회복하자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실학자들이 발해사 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