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의 발달과 농노 해방] 도시와 상업의 발달은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던 농촌(장원) 경제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으며, 화폐가 널리 사용됨에 따라 장원의 영주나 농…

[화폐의 발달과 농노 해방] 도시와 상업의 발달은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던 농촌(장원) 경제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으며, 화폐가 널리 사용됨에 따라 장원의 영주나 농민도 화폐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민들도 돈을 벌기 위한 생산을 시작했으며 영주도 부역에 의해 경작하던 직영지를 농민에게 빌려 주고 그 지대(소작료)를 화폐로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영주는 농민을 장원에 매어 둘 필요가 없어져 돈을 받고 농민을 농노의 신분에서 해방시켰다. 이를 농노 해방이라 하는데 상업과 도시가 일찍 발달한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12~13세기에 농노 해방이 이루어졌다.

[장원 제도의 붕괴] 14세기에는 잇따른 전쟁과 유럽을 횝쓴 흑사병(페스트)으로 농촌의 인구가 크게 줄어들어 영주는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농민에 대한 대우를 개선하였다. 그리하여 농민의 지위는 점점 높아져서 지대만 갚는 자유 농민으로 바뀌어 갔다. 따라서 농노 제도에 바탕을 두었던 장원 제도 또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장원의 붕괴로 곤궁에 빠진 영주는 마지막 수단으로 다시 농민에게 무거운 부담을 지우려 하였다. 그러자 각지의 농민들이 영주에 항거하여 와트 타일러의 난(1381년) 같은 대대적인 농민 반란을 일으켰다. 이 농민 반란은 모두 진압되기는 하였으나 장원의 붕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장원은 유럽 봉건 제도의 경제적 기반이었으므로 장원의 붕괴와 함께 중세 봉건 사회도 무너졌다.
 
[자유 농민] 영주에게 돈을 지불하고 농노의 신분에서 해방된 농민을 말한다. 이들은 농노와는 달리 영주에게 화폐로 지대를 납부하는 일 외에는 어떠한 의무나 속박도 없는 자유 신분이었다. 영국·프랑스·독일 서부 등지에서 많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