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 선언] 이탈리아 항복 후인 1943년에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제스 총통 등 세 사람은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전후 처리 문제를 …

[카이로 선언] 이탈리아 항복 후인 1943년에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제스 총통 등 세 사람은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전후 처리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회담을 가졌다. 여기에서는 주로 일본의 영토 문제에 대한 방침이 결정되었는데, 일본이 차지한 해외 영토를 모두 무효로 해 만주와 대만(타이완)을 중국에 돌려주고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카이로 선언이 발표되었다.

[이어지는 전후 처리 회담] 곧이어 루스벨트·처칠·스탈린 등이 테헤란에 모여 노르망디 상륙 작전 등에 대해 협의하였다(테헤란 회담). 또한 1945년 2월에는 미국·영국·소련의 3대표가 크림 반도의 얄타에 모여 독일 항복 후의 처리 문제와 새로운 국제 기구 창설의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얄타 회담). 이 얄타 회담 이전에 소련군은 이미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4월에는 베를린 시내에 돌입하였다. 이때 히틀러는 절망 속에서 자살하고 독일은 무조건 항복하였다(1945년 5월 7일). 같은 해 7월 트루먼과 처칠·스탈린이 베를린 근처의 포츠담에 모여서 일본에 항복을 권하고 항복 조건을 내세운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였다.

[일본의 항복과 대전의 종전] 일본 정부는 회담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버티었다. 그러나 8월에 들어서자 일본의 숨통을 조이는 결정적인 두 가지 사건이 벌어졌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떨어지고 소련이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한 것이다. 결국 1945년 8월 15일 일본도 마침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