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촌락/토지와 조세 제도/향·부곡 /귀족들의 생활/수도 금성의 모습

[신라의 촌락]

신라 시대의 농민들은 보통 촌락이라는 말단 행정 구역에 편입되어 있었다.

1. 촌락의 구성
신라에서는 대체로 혈연을 중심으로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열 집 정도가 모여 하나의 촌락을 이루었다. 국가는 마을의 우두머리인 촌주를 통해 촌락을 지배하였는데, 몇 개의 마을이 한 사람의 촌주에 의해 다스려지는 경우도 있었다. 

2. 국가의 관리
일본에서 발견된 신라의 민정 문서(신라 시대의 토지 문서)를 보면, 남녀별·연령별로 정확한 인구와 소·말, 뽕나무·호두나무·잣나무 등의 수를 3년마다 한 번씩 통계를 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국가가 전국의 촌락 형세를 정확히 파악해 국가 재정의 기반을 튼튼히 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통일 후에는 노동력과 생산 자원이 더욱 철저하게 관리되었다.

[토지와 조세 제도] 

1. 토지 제도
촌락에는 나라에서 소유하는 몇 종류의 토지가 있었고, 촌주에게 지급된 토지와 농민들에게 지급된 토지가 따로 있었다. 농민들은 공동으로 그 땅을 경작하고, 일부를 조로써 나라에 바치고 나머지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2. 조세 제도
국가에서는 농민으로부터 가능한 한 모든 것을 거둬들였는데, 심지어 농민들이 기르고 가꾸는 가축이나 과일나무에 대해서도 일정한 세를 내게 하였다. 이 시기의 농민 부담은 조세와 공물, 부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중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는 부역이었다.

[향·부곡]

신라 때에는 촌락 외에도 향·부곡으로 불리는 천민 집단 거주 지역이 있었다. 촌락이 신분상 양인의 거주지인 데 반해 향·부곡에는 전쟁 포로나 죄인,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모아 살게 하였다. 향·부곡의 백성들은 노비와 마찬가지로 천민 취급을 받았다. 이들은 국가나 귀족을 위해 농업이나 목축, 수공업 활동 등 노동에 종사하였다. 이러한 천민 집단 거주지의 존재는 신라 사회가 지니는 특징 가운데 하나로, 고려 시대에까지 그대로 계승되었다.

[귀족들의 생활]

농민들이 조세와 부역에 시달리면서 가난한 생활을 한 것에 비해, 귀족들은 수도 금성을 중심으로 저택과 별장을 가지고 사치와 향락 생활을 즐겼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녹읍과 사전을 받아 많은 토지를 가지고 그곳에 사는 농민들을 노비처럼 부렸다. 뿐만 아니라 섬이나 산간에 목장을 가지고 가축을 사육하는 한편, 고리대업에까지 손을 대 재산을 불렸다. 그리하여 "재상의 집에는 공물이 끊이지 않고 노비가 3,000명이요, 집에서 기르는 사병과 소와 말·돼지가 또 그만큼이다." 라고 할 정도까지 이르렀다.

[수도 금성의 모습]

1. 생활상 
금성은 한 번도 외적의 침입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통일 이후에는 더욱 번성하였다. 성 안에는 기와지붕과 담이 잇닿아 있었고, 궁궐이나 저택, 별장들이 웅장하게 솟아 있었다. 또 집들이 연기에 그을리지 않도록 숯으로 밥을 지었으며, 거리에는 노랫소리가 넘쳐흘렀다.

2. 유적
오늘날 경주에서 그 유적을 찾을 수 있는 월성 동쪽의 안압지·임해전, 남산 서쪽의 포석정 등은 모두 이 당시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의 모습을 그대로 말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