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의 만세 운동 계획/만세 운동의 전개 과정과 결과/만세 운동의 확산과 의의

[학생들의 만세 운동 계획]

6·10 만세 운동은 두 갈래로 계획되고 추진되었다. 한 갈래는 조선 학생 과학 연구회를 중심으로 한 전문학교 학생들이었고, 다른 한 갈래는 중등학교 학생들이었다.

[만세 운동의 전개 과정과 결과]

1. 순종의 인산일
(1) 학생들의 만세 시위는 순종의 인산일(임금의 장례식 날)인 1926년 6월 10일에 있었다. 이날 수많은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순종이 누워 있는 대여(나라에서 쓰던 큰 상여)가 돈화문을 출발하였다.
(2) 이날 돈화문에서 홍릉에 이르는 도로 양측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기마 경찰과 헌병이, 뒤에는 사복 경찰이 감시하고 있었다.

2. 중앙 고보 학생들의 만세 시위 
학생들의 만세 시위는 대여가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때 중앙 고보 학생들이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고 격문을 뿌리면서 시작되었다. 

3. 보성 전문학교와 연희 전문학교 학생들의 만세 시위
(1) 대여가 관수교를 통과할 때에는 행렬 동쪽에 줄지어 있던 보성 전문학교 학생 수십 명도 격문을 뿌리며 "대한 독립 만세"를 높이 외쳤고, 그 옆에 있던 연희 전문학교 학생들도 독립 만세를 외쳤다. 
(2) 두 학교 학생들의 시위는 일본 군대의 저지로 더 나가지 못했는데, 기병 의장대의 말들이 놀라 뛰는 바람에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4. 다른 지역의 만세 운동
이날 서울에서는 세 학교 외에도 장사동, 관립 사범학교 앞, 훈련원 부근, 동대문 부인 병원 입구, 창신동 동묘 부근, 신설동 등지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관수교 부근에서 일본 군대가 총을 쏘았다는 말이 나돌자 군중들도 만세 운동에 가담하고 지방에서도 들고 일어났다.

5. 학생들의 체포
6·10 만세 운동으로, 서울에서는 학생 수백 명이 체포되었다.

[만세 운동의 확산과 의의]

1. 지방으로 확산
6·10 만세 시위 운동은 서울에서만 있었으나 이 사실이 지방에 알려지자 곧바로 고창, 순창, 정주, 군산, 울산, 평양, 공주 등지로 퍼져 나갔고, 이어 당진, 홍성, 강경, 전주, 하동, 이원 등지로 번져 나가면서 동맹 휴교로 이어졌다. 

2. 의의
6·10 만세 운동은 3·1 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은 항일 운동으로 이후의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