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 연구의 세 가지 흐름/신앙 운동과 교회 설립/천주교에 대한 억압/천주교의 성장

[서학 연구의 세 가지 흐름]

서학 연구가 크게 유행하던 조선 후기에는 서학에 대한 세 가지 흐름이 있었다.

1. 적극 배격
신후담 등은 서학을 위험하다고 보고 적극 배격하였다.

2. 부분 배격
안정복과 박제가, 홍대용 등은 서양의 과학 기술은 받아들이되 종교와 윤리 생활은 배격해야 한다는 부분 배격파이다.

3. 적극 수용
이익의 제자들인 이벽과 정약전, 권철신, 권일신, 이가환 등은 서학의 내용은 실천할 만한 가치가 있으므로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신앙 운동과 교회 설립]

1. 서학 연구와 신앙 운동
서학 연구가 신앙 운동으로 발전한 것은 남인 학자 이승훈과 정약종, 이가환, 권철신, 정약용, 이벽 등을 중심으로 교리 연구회가 발족하면서부터다. 

2. 최초의 세례 교인과 교회 설립
(1) 이승훈은 그의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 베이징에 갔다가 그곳에서 세례를 받은 다음 서적과 십자가, 성화 등을 얻어 왔다. 이로써 이승훈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은 천주교인이 되었다.
(2) 이승훈은 귀국하여 자신이 나라 안의 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는 한편, 1784년에는 이벽 등의 동지들과 함께 조선 교회를 창설하였다.
(3) 1785년에는 명례동(지금의 명동)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 예배당을 차리고 이벽을 대표로 뽑아 전도 집회를 열었는데, 이 모임이 우리나라 교회 사상 최초의 교회 집회이다. 

[천주교에 대한 억압]

조정에서는 천주교인들의 집회를 매우 불온한 집회로 보고 당시의 천주교 지도자인 이승훈, 이벽, 권철신과 권일신 형제, 정약용과 그의 형들인 약전과 약종 등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잡아들인 이들이 대개 명문가의 젊은 학자들이었으므로 타일러서 보내고 예배 장소를 제공한 김범우만을 처벌하는 데 그쳤다.

[천주교의 성장]

1. 천주교의 평등 사상과 내세 신앙
조정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한번 전도 집회를 시작하자 천주교를 믿으려는 사람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모든 사람은 귀천이 없고 평등하다'는 만인 평등사상과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으면 천당에 갈 수 있다'는 내세 신앙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2. 교인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은 주로 사회에서 멸시당하는 천민과 상민, 그리고 중인들과 권력에서 밀려난 양반들이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문 밖을 출입하려면 장옷이나 너울을 머리 위에 써야만 했던 부녀자들이 대담하게 이 천주교 집회에 모여들어 남자들과 한자리에 앉아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