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 정비와 당과의 대립/발해의 전성기/발해의 멸망

[체제 정비와 당과의 대립]

1. 체제 정비
발해는 고구려 유민들이 말갈인이 살던 곳에 세운 나라였으므로 초기에는 나라의 통치 체제가 굳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무왕 때에는 안으로 나라의 통치 제도를 정비하고 밖으로 일본에 사신을 보내는 한편, 당과 팽팽히 대립하면서 영토를 크게 넓혔다.

2. 당과 신라와의 대립
발해에 불안을 느낀 당은 말갈 추장으로 하여금 발해와 대립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무왕은 말갈 추장을 정벌하는 동시에 장문휴로 하여금 해군을 이끌고 당나라의 등주를 공격하게 하였다. 당은 신라와 동맹해 남서 양면으로 발해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물러갔다. 이후 당나라는 신라와 친선을 내세워 대동강 이남 땅에 대한 신라의 소유를 인정하면서, 신라로 하여금 발해를 견제하도록 하였다.

[발해의 전성기] 

1. 당과의 관계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왕은 랴오둥 반도(요동반도)까지 손을 뻗치는 등 대외적 발전에 힘쓰는 한편, 처음으로 당과 화친하고 발달한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여 국내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2. 영토의 확장 
(1) 발해가 가장 융성한 것은 10대 선왕 때이다. 이때 발해는 유학생을 당에 보내 발달한 문화와 제도를 익히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영토의 확장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북으로 헤이룽 강, 동으로 연해주, 서쪽으로 요동, 남쪽으로 영흥 지방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2) 당시 중국에서는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의 '해동성국'이란 이름으로 발해를 불렀다.

[발해의 멸망] 

선왕 이후 발해는 고구려 계통의 지배층과 말갈인 사이의 화합이 무너지고, 지배층이 분열하면서 기울어지기 시작해 마침내 애왕 때인 926년, 거란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이때 지배층이던 고구려 계통의 많은 사람이 고려로 귀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