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들의 고통/홍경래의 난/임술민란/농민 봉기의 의의

[농민들의 고통]

1. 농민 봉기
세도 정치의 폐단으로 국가와 사회가 크게 어지러워지고, 탐관오리가 각지에서 날뛰어 국가의 재정과 국민의 경제생활이 크게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에 백성들은 분노하여 탐관오리에 대한 저항은 물론 자각 운동까지 일기 시작하였다. 농민의 불만은 탐관오리를 비방하는 벽서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흉년이 계속되고 전염병마저 유행하자 민심은 더욱 악화되어 전국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2. 홍경래의 난과 임술민란 
농민의 항거에는 농민만이 아니라 세도 정치에 불만을 품은 지방 양반들도 가담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1811년(순조 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과 1862년(철종 13년)에 일어난 임술민란(진주 민란)이다.

[홍경래의 난]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는 평안도에서 우군칙 등 중소 지주 출신의 하층 양반과 상인을 중심으로 하여 유랑 농민을 규합해 1811년에 난을 일으켰다.

1. 중심
홍경래의 난은 세도 정치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건국 초부터 부당한 차별 대우에 불평을 품어 오던 서북(관서) 지방민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2. 원인
당시 평안도에서는 오랫동안 흉년이 계속되었는데도 조정에서는 아무런 대책을 세워 주지 않았다. 게다가 평안도 사람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중앙에서 등용하지 않아 주민들의 불만과 분노는 대단하였다.

3. 경과  
(1) 반란군은 평안도 가산에서 난을 일으킨 지 불과 며칠 만에 선천, 정주 등 청천강 이북의 8개 고을을 점령하고 그곳의 탐관오리들을 내쫓았다. 이어 평양을 점령하기 위해 청천강 이남으로 진출하려 하였으나, 전투 장비와 훈련이 부족해 강을 건너기도 전에 관군과의 첫 싸움에서 패하였다.
(2) 관군에게 패한 후 정주성으로 물러나 약 3개월 동안 관군에게 포위된 채 성 안에서 항거하였다. 그러나 식량이 부족해 성 안에 있는 소나무 껍질까지 벗겨 먹으며 버티다가 마침내 상당수가 밖으로 나와 항복하였다. 성 안에 있던 사람들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전사하거나 관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하고, 마침내 홍경래의 난은 1812년에 진압되었다.

4. 영향
홍경래의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 영향은 거의 전국에 미쳐서, 각지에 불온한 벽보가 나붙고 조정과 세도가들을 저주하는 말들이 곳곳에서 나돌았다.

[임술민란]

1862년에 일어난 임술민란은 진주에서 시작되었는데, 병마절도사 백낙신의 가혹한 탄압과 착취에 항거해 양반 출신의 농민 유계춘을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 봉기이다.

1. 경과
농민군은 죽창을 들고 읍내로 쳐들어가 관청과 관리, 토호의 집을 불사르고 간악한 관리를 잡아 죽이는 한편, 한때는 진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박규수를 안핵사로 파견해 농민들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한편, 부패한 관리들을 파면해 난을 평정하였다.

2. 영향
임술민란을 계기로 농민들의 항거는 다른 지방에도 계속하여 파급되었다. 그리하여 함경도의 함흥을 비롯해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그리고 남쪽의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각지에서 잇따라 농민이 봉기하였다.

[농민 봉기의 의의] 

농민 봉기는 단순히 농민의 폭동이었다기보다는 당시의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농민들의 자각 운동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그때마다 관군에 진압되기는 했으나,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농민들의 사회의식은 더욱 성장하였다. 나아가 농민들의 주체적 항쟁은 양반 중심의 모순된 지배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