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 일본 원정과 내정 간섭/관제의 개편/영토의 변화/풍속의 변화

[원의 일본 원정과 내정 간섭]

몽고는 1271년에 나라 이름을 원으로 고치고, 삼별초의 항쟁이 끝난 뒤부터 고려에 여러 가지로 압력을 가하였다.

1. 일본 원정 협조 강요
원은 먼저 일본 원정에 고려가 협력하기를 강요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원의 일본 원정은 태풍으로 모두 실패했으나 이 원정으로 인해 고려가 입은 경제적·군사적 손실은 막대하였다. 고려는 군대 제공 외에도 많은 군량의 보급과 함선의 건조를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2. 정동행성을 통한 내정 간섭
원은 일본 원정을 위해 정동행성이라는 관청을 두었는데, 원정이 끝난 후에도 그대로 두고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의 관제가 개편되고, 공식 용어도 많이 바뀌었다.

[관제의 개편]

고려의 중앙 관제는 원의 사위가 된 충렬왕 이후 원의 간섭 아래에서 개편되었다.

1. 중앙 정치 기구의 개편
기존의 2성 6부 제도가 폐지되고 2성은 첨의부로, 6부는 전리사(이부와 예부를 합침)·군부사(병부)·판도사(호부)·전법사(형부)의 4사로 개편되었다. 공부는 아예 없어지고, 도병마사는 도평의사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수상인 문하시중은 첨의중찬, 육부의 으뜸 벼슬인 상서는 판서로 격이 낮아졌다.

2. 고려 임금의 지위 격하
(1) 왕을 부를 때 쓰던 호칭인 폐하도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낮추어 불렀다. 또 임금의 묘호(죽은 다음에 부르는 칭호)에 태조, 인종 등과 같이 조와 종을 붙이지 못하고 '○○왕'으로만 부르도록 하였다. 또한, 왕이 바뀔 때에는 원나라 황제의 승인을 받도록 하였다.
(2) 한때는 고려 왕실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의 왕족을 만주의 심양왕으로 삼아 고려의 임금과 대립하게 하였다.

[영토의 변화]

원의 간섭은 정치에만 그치지 않고, 고려의 영토에 직속령을 두고 다스렸다.

1. 원의 통치 기구 설치
(1) 원은 이미 고종 말년에 고려 반역자들의 항복을 받아 철령 이북의 땅을 직속령으로 삼고 화주(지금의 영흥)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였다.
(2) 원종 때에는 다시 자비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고 서경에 동녕부를 두는 한편, 삼별초의 항쟁을 꺾은 뒤에는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목마장을 두어 다스렸다.

2. 영토의 탈환
동녕부와 탐라총관부는 충렬왕 때 다시 찾았으나, 쌍성총관부는 공민왕이 유인우를 시켜 무력으로 되찾을 때까지 약 100년 동안이나 원의 지배에 놓여 있었다.

[풍속의 변화]

고려와 원이 문물을 교류함에 따라 양국 사이에 귀족, 문인, 기술자, 상인들이 자주 왕래하게 되면서 몽고의 풍속이 고려로 많이 들어왔다.

1. 몽고의 풍속
(1) 고려 상류 사회에서는 몽고어가 유행하고, 몽고식 이름을 짓는 사람이 생기는가 하면, 몽고식 옷이나 몽고식 머리 모양인 변발이 유행하였다.
(2) '장사치', '벼슬아치' 등과 같이 사람을 가리키는 데에 '치'라는 말이 쓰인 것이나, 족두리와 연지 찍는 결혼 풍속 등도 모두 이때 들어왔다.

2. 조혼 풍습
몽고에서 고려의 여자를 요구해 사회 문제가 일어나고 일찍 결혼하는 조혼 풍습까지 생겼다.
 
3. 고려양
고려와 원이 문물을 교류하는 과정에서 고려의 문화도 몽고에 소개되고, 고려 풍습이 몽고의 상류 사회에 유행되기도 하였는데, 이처럼 고려에서 건너간 풍속을 고려양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