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의 독립 운동/의거 과정/재판과 순국/의거의 의의

[안중근 의사의 독립 운동]

안중근은 한때 황해도에서 교육 활동에 힘쓰면서 독립 운동을 하다가 국외로 나가 의병을 조직해 일본군과 싸웠다. 특히 1909년 6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편성 지휘하며 두만강을 건너 경흥까지 들어와 일본군과 싸우기도 하였다.

[의거 과정]

1909년 가을, 한국 침략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재무 대신과 만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하얼빈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유동진 등 세 사람과 함께 이토를 처단하기로 계획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사살하였다.

[재판과 순국]

거사 후 체포된 안중근은 6회에 걸친 공판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한국 침략과 동양 평화를 어지럽힌 사실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거사는 대한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한 정당한 일이었다고 말하였다. 일제의 재판에서 안중근은 사형을 선고받아 32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의거의 의의] 

안중근의 의거는 일제의 침략에 대한 우리 민족의 강렬한 독립 정신과 대한 남아의 기상을 전 세계에 보여 준 쾌거였다. 이 의거로 일제의 침략상이 세계에 널리 알려졌고, 이후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