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수복을 위한 의병들의 연합/서울 진공 작전의 실패/의병들의 계속된 항일 투쟁/일본군의 탄압과 의병 활동의 변화/국권 침탈 이후의 의병 활동

[서울 수복을 위한 의병들의 연합]

각지에서 활동하던 의병 부대는 전국의 의병을 연합해 적의 수중에 들어 있는 서울을 되찾고자 연합 작전을 계획하였다. 

1. 전국 의병의 연합
의병장 이인영은 경기도 양주에 진출해 비밀리에 전국 의병장에게 의병의 일치단결을 촉구하는 격문을 보내 양주에 모이도록 하였다. 동시에 부하 김세영을 서울에 잠입시켜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의병은 국제법상 합법적인 교전 단체이므로 정의 인도적 입장에서 성원해 주기 바란다'는 호소문을 보냈다. 이러한 사실은 의병 운동이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전국에서 모인 의병 
이인영의 비밀 격문에 따라 의병장들이 의병을 이끌고 양주로 모여들었다. 강원도에서 민긍호·이구재·이은찬, 충청도에서 이강년, 전라도에서 문태수, 경기도에서 허위, 황해도에서 권중희, 평안도에서 방인관, 함경도에서 정봉준 등이 의병을 이끌고 양주에 모였다. 전구에서 모인 의병의 총수는 약 1만 명을 달하였다.  

[서울 진공 작전의 실패]

양주에 모인 의병장들은 이인영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삼아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다. 선발대가 먼저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해 전군의 도착을 기다렸다. 그러나 의병의 계획을 알아챈 일본군이 먼저 공격을 해 오고, 후속 부대와도 연락이 끊겨 큰 어려움을 겪었다. 더욱이 일본군의 병력이 우세했기 때문에 의병 부대는 서울 진공 작전을 이루지 못한 채 철수하였다. 

[의병들의 계속된 항일 투쟁]

비록 서울 진공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이에 참여한 의병 부대들은 다시 각기 여러 방면에서 계속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런 가운데 민긍호는 치악산 밑 영월의 강림촌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하였고, 이강년은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사형당하였다.

[일본군의 탄압과 의병 활동의 변화] 

1. 일본군의 의병 탄압
의병 활동이 결렬하게 일어나자 일본군은 병력을 더욱 증강해 의병을 탄압하였다. 특히 일본군은 전라도 지방의 의병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하였다. 일본군은 닥치는 대로 불을 지르고 약탈과 폭행을 일삼았다.

2. 유격전 전개 
일본군의 탄압으로 인해 전국의 의병들은 산간벽지를 근거지로 유격전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국권 침탈 이후의 의병 활동]

1910년에 국권을 잃은 뒤에는 만주와 연해주로 대일 항쟁의 무대를 옮겨야 하였다. 이로써 의병은 독립군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이후 의병 활동은 독립군과 광복군의 독립 투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