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외 정세/국내 정세/정치적 혼란/명과 고려의 대립/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대외 정세]

공민왕의 개혁 정치가 권문귀족 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로 돌아간 뒤, 고려는 안팎으로 더욱 큰 어려움에 빠졌다. 북으로는 홍건적의 침략을 두 차례나 받아 한때 개경이 함락되기도 하였고, 남으로는 왜구가 삼남 지방의 해안을 노략질하며 침범하였다. 왜구는 공민왕 때 이후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육지에까지 깊숙이 들어와 소란을 피우고 피해를 주었다.

[국내 정세]

1. 권문세족과 신진 사대부의 대립
안으로는 토지와 노비를 많이 차지하고 농장을 경영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권세를 잡아 온 권문 귀족과, 성리학을 공부해 학문적인 교양을 갖추고 과거에 합격해 중앙 정계에 진출한 신진 관료 사이에 정치적 대립이 생겨 극심한 혼란이 빚어졌다.

2. 신진 사대부와 신흥 무인 세력의 협력
(1) 행정 실무에도 밝은 신진 사대부들과 빠르게 성장한 신흥 무인 세력은 고려 후기의 사회적 불안과 국가적 시련을 과감히 해결하고, 새로운 국가 활동을 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2) 신진 세력은 권문세족을 비롯해 사원 세력과도 대립하면서 성장해 갔는데, 그 중심인물이 조준과 정도전 등이다. 이들은 신흥 무인 세력인 이성계와 손을 잡고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정치적 실권을 잡으려고 하였다.

3. 이성계의 부상
이때 이성계는 북쪽에서 침입해 들어오는 나하추의 세력을 물리치고 왜구의 침입을 거듭 격파해 용맹을 떨치면서 중앙 정계에 이름을 알렸다.
 
[정치적 혼란] 

공민왕은 노국 공주(중국 원나라 위왕의 딸로, 공민왕의 왕비)를 잃은 뒤 간사한 무리에게 정치를 맡긴 채 향락을 일삼다가 1374년에 신하들의 손에 살해되었다. 그 뒤를 이어 우왕이 즉위하였으나 행실이 바르지 못해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더구나 즉위 초에 세력을 잡은 이인임 등이 사욕에 눈이 어두워 정치를 크게 그르친 까닭에 사회 질서는 전보다 더욱 어지러워졌다. 이때 최영, 이성계 등의 무신들이 힘을 합쳐 이인임 일당을 내쫓았다.

[명과 고려의 대립]

1. 명의 건국
고려 말기 중국에서는 몽골 족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 일어난 명이 원을 몽골 지방으로 몰아내고 만주를 차지해 고려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고려는 공민왕 때부터 원나라와는 관계를 거의 끊고 명나라와 가까이 지냈다.

2. 명의 무리한 요구와 고려의 요동 정벌론
우왕 때에 이르러 명나라는 한때 원이 지배한 철령 이북의 우리 땅을 넘겨줄 것과 과중한 조공을 요구해 고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당시 고려의 실권을 쥐고 있던 친원파의 최영은 명의 요구를 거절하고 먼저 요동 지방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로써 고려 조정에서는 요동 정벌론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1. 요동 정벌과 위화도 회군
1388년에 최영은 팔도 도통사가 되어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로 임명한 뒤 요동 지방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친명파인 이성계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워 조민수를 설득한 뒤 압록강의 위화도까지 갔다가 군사를 되돌렸다. 이 사건이 바로 위화도 회군이다.

2. 이성계의 집권  
회군하여 개경으로 돌아온 이성계는 최영을 잡아 귀양 보내 죽이고, 이어 우왕도 강화도로 귀양 보냈다가 죽였다.

<더 알아보기>

[사불가론]

사불가론(四不可論)이란 이성계가 요동 정벌을 반대한 네 가지 이유를 말한다.

1. 소국이 대국을 거역하는 것은 불가하다.
2. 여름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하다.
3. 거국적인 원정은 왜구가 침입할 틈을 주게 되므로 불가하다.
4. 시기가 장마철이라 활이 휘고 군사가 병이 들기 쉬워 불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