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왕국의 분열] 프랑크 왕국은 카롤루스 대제(카를 대제)의 손자 대에 이르러 영토 상속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 3국으로 분열되었다. 즉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 …

[프랑크 왕국의 분열] 프랑크 왕국은 카롤루스 대제(카를 대제)의 손자 대에 이르러 영토 상속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 3국으로 분열되었다. 즉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 루트비히가 죽자 그의 세 아들은 나라의 상속을 놓고 분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상속 분쟁이 거듭된 끝에 베르됭 조약(843년)이 맺어져 장남 로타르는 이탈리아와 중부 프랑크를, 차남은 동 프랑크를, 3남은 서 프랑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로타르가 죽은 뒤 두 동생의 강요로 다시 메르센 조약(870년)이 맺어져 중부 프랑크를 서로 나누어 가졌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은 동 프랑크(지금의 독일)와 서 프랑크(지금의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의 세 나라로 갈라지게 되었다. 

[동·서 프랑트 왕국의 상황] 서 프랑크에서는 10세기 말에 카롤링거 왕조의 혈통이 끊어졌으므로, 제후(대영주)들은 위그 카페를 왕으로 받들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카페 왕조가 세워졌으나, 왕권이 약하여 파리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에 불과하였다. 동 프랑크에서도 10세기 초에 카롤링거 왕조가 끊어진 뒤 유력한 제후들이 왕을 선출하게 되었는데, 그 세 번째 왕이 오토 1세이다. 오토 1세는 이탈리아에 원정하여 교황을 도와준 공로로 962년에 '신성 로마 황제'의 관을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독일은 신성 로마 제국이라 불렸고, 독일 왕은 황제의 지위와 이탈리아 왕을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 황제들은 이탈리아를 지배하는 일에 골몰하여 국내 정치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나라 안이 어지러웠다.

[이탈리아의 혼란] 이탈리아는 이미 875년에 카롤링거 왕조가 끊긴 뒤 분열 상태가 계속되었다. 게다가 교황을 비롯하여 여러 제후와 도시들이 대립해 있는 데다가 오토 1세 이후로는 독일 황제의 간섭까지 겹쳐서 더욱 혼란에 빠졌다.

[신성 로마 제국] 962년 오토 1세가 로마 교황 대관을 받은 때부터 19세기 초까지의 독일 국가 이름이다. 962년에 독일 왕 오토 1세가 로마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은 데서 시작되었다. 그 후 독일에서는 왕이 즉위하면 이탈리아에 가서 교황으로부터 대관하여 신성 로마 황제의 제위를 겸하였다. 그러나 제후들의 힘이 강하여 분열 상태가 계속되다가 1806년에 나폴레옹 세력하의 제국 제후 16명이 라인 연방(라인 동맹)을 맺어 신성 로마 제국을 탈퇴함으로써 완전히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