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청나라에서 일어난 근대화 운동.

[양무운동과 개혁의 내용] 태평천국 운동을 겪는 동안 증국번·이홍장 등의 한인 정치가들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이들은 서양의 발달한 과학 기술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이를 양무운동이라고 한다. 양무운동은 동치제(목종, 재위 1862~1874년) 시대에 추진되어 어느 정도의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으므로 동치 중흥이라고도 부른다. 양무운동의 첫걸음은 군대의 장비와 무기의 개선이었으며, 다음은 무기와 군함을 만드는 공업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또한 서양 문물을 배워 오기 위한 유학생도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각 지방에 군수 공장이 세워지고, 나아가 광산 채굴, 철도·전신 시설에 이어 방직 등 근대 산업으로 확대되었다.

[운동의 실패와 이어지는 패전] 양무운동은 '중체서용(中體西用)'이라 하여 중국의 정치 제도 등은 그대로 둔 채 서양의 기계 문명만을 받아들이려고 했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결국 참다운 근대화를 이룩하지 못한 청나라는 청프 전쟁(1884~1885년)에서 프랑스에 패함으로써 베트남에서 물러섰고, 그 후 청일 전쟁(1894~1895년)에서도 패하여 대만(타이완)을 빼앗겼다.

[병든 돼지로 불리던 중국] 아편 전쟁과 애로호 사건이 있은 뒤에도 서양인들은 중국을 두고 '잠자는 사자'라 하여 은근히 두려워하였다. 다시 말해 한번 잠에서 깨어나면 무서운 실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청일 전쟁에서 일본과 같은 작은 나라에게도 무참히 깨지는 것을 보고는 '잠자는 사자'가 아니라 '병든 돼지'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서양 각국은 앞 다투어 중국을 침범하기 시작하였다. 곧 러시아는 랴오둥 반도 남부를, 독일은 자오저우 만과 칭다오를, 프랑스는 광저우 만을 그리고 영국은 웨이하이를 차지하였다. 여러 나라가 차지한 이들 땅은 '조차(한 나라가 다른 나라 국토의 일부를 일정 기간 빌림)'라 하여 형식상 얼마 동안 빌린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그 기간이 길어 그들 나라의 영토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