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과의 관계/왜구와 3포/여진과의 관계

조선은 안으로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는 한편, 밖으로는 이웃 나라와의 평화에 힘썼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는 실력으로 우리의 국토를 확장하는 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명과의 관계]

명에 대해서는 명분을 살려주면서 사신의 왕래를 통해 경제적, 문화적 실리를 취하는 외교 정책을 취하였다.

1. 친명 사대 정책의 필요성
아직 왕권이 확립되지 않은 조선으로서는 친명 사대 정책이 불가피하였다. 이는 조공과 복속을 요구하는 명에 따름으로써 대외적으로 평화를 유지하고 대내적으로는 왕조의 안전을 기함으로써 나라 안의 일을 적극적으로 펴 나감은 물론, 정치와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배려에서였다.

2. 조선과 명의 친선 관계
태조 때에는 우리나라가 요동 지방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명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태종 이후에는 친선 관계가 맺어져 명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왜구와 3포]

일본은 당시 내란이 계속되어 국내가 몹시 혼란하였는데, 그 틈에 우리 해안을 노략질하는 왜구들이 끊이지 않았다.

1. 왜구 토벌 노력 
(1) 태조는 즉위 이전에도 왜구 토벌에 힘을 기울였지만 즉위 후에도 해안 지방의 방비를 엄중히 하고, 일본에 대해 왜구를 금지시켜 달라고 촉구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본은 정식으로 우리나라에 사절단을 보내는 등 한동안은 왜구가 활동하지 않았다.
(2) 다시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1419년에는 이종무로 하여금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게 하였다.

2. 일본과의 교역
(1) 쓰시마 섬 정벌 이후 왜구의 청을 받아들여 일본인이 출입하며 통상할 수 있는 부산포(지금의 부산진)·제포(지금의 경상남도 진해)·염포(지금의 울산) 등 3포를 개항하고, 이곳에만 일본 배의 정박을 허용하였다.
(2) 교역품은 쌀, 무명, 삼베, 서적, 공예품 등을 보내고, 향과 향료, 약재, 은, 구리, 납, 설탕 등을 들여왔다.
 
3. 계해조약과 임신약조 
3포에 일본인이 거주하게 되면서 이들로 인하여 말썽이 생기자, 이들의 무역 활동을 제한하는 새로운 약조인 계해조약과 임신약조를 맺었다.

[여진과의 관계]

1. 여진족의 상황
북방의 여진족은 몽골 족에 패망한 뒤로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만주 지방을 근거로 부족 단위로 살고 있었다. 이들은 통일 국가를 쉽게 이루지 못하고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흩어져 살면서 고려 말의 어수선한 틈을 타 북방을 자주 시끄럽게 하였다.

2. 회유책와 강경책 사용
(1) 태조 이후로 여진족의 귀화를 장려해 관직과 토지, 생활 물자 등을 주어 우리 주민으로 동화시키기 위한 회유책을 썼다. 그리고 국경 지방인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두어 국경 무역을 허락하였다.
(2) 한편으로는 강경책을 써서, 국경 지방에 진과 보를 설치하고 방비를 강화하고, 때로는 대규모 원정군을 보내 여진족의 본거지를 토벌하기도 하였다.

<더 알아보기>

[계해약조와 임신약조]

1. 계해약조
(1) 계해약조는 3포에 일본인이 거주하게 되면서 무질서해지자 이를 규제하기 위해 1443년(세종 25년)에 쓰시마 섬의 도주와 체결한 약조이다.
(2) 내용은 해마다 조선에서 쓰시마 섬에 원조하는 곡식을 200석으로 하고, 쓰시마 섬의 무역선은 1년에 50척으로 제한하는 것 등이었다.

2. 임신약조
임신약조는 1512년(중종 7년)에 쓰시마 도주와 맺은 약조로, 왜인에 대한 제한을 엄격히 하여 3포에 왜인의 거주를 금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