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간의 전쟁으로 인한 피해/민족 정신의 자각/국방 강화/신분 제도의 동요/일본의 문화 발달/동북아시아의 정세 변화

[7년간의 전쟁으로 인한 피해] 

1592년(선조 25년)부터 1598년(선조 31년)에 걸친 7년간의 큰 전쟁을 치루는 동안 우리나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1. 국토의 파괴와 인명 피해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전 국토가 참혹한 전쟁터였던 까닭에 어느 곳 하나 파괴되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인명과 재산의 손실도 매우 컸다. 일본으로 끌려간 동포 가운데는 멀리 동남아시아에까지 노예로 팔려 간 사람도 있었다.

2. 문화재 파괴
경복궁과 불국사, 사고(춘추관, 충주, 성주)를 비롯해 많은 문화재가 잿더미로 변하였다.

3. 농촌의 피해
논밭이 황폐해져 경지 면적이 3분의 1로 줄어들어 농촌은 극심한 생활고에 부딪혔다.

4. 국가 체제의 붕괴
왜란은 이미 붕당 싸움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조선의 정치와 경제, 사회가 결정적으로 무너지는 계기를 제공하여다. 

[민족 정신의 자각]

왜란을 통해 우리 민족은 다시 민족의식을 강화하게 되었고, 이후 오랫동안 일본에 대한 민족적 감정이 풀리지 않았다. 한편 이순신을 비롯한 여러 장군과 의병장에 대한 국민의 존경심이 매우 대단해 그들을 모시는 사당이 곳곳에 세워졌다. 또한 뜻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붕당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자각이 싹트기도 하였다.

[국방 강화]

일본의 조총이 들어오고, 이장손은 오늘날의 박격포와 비슷한 비격진천뢰를 발명해 많은 적선을 쳐부수는 데에 기여하였다. 또 일종의 탱크인 화차를 변이중이 발명하여 행주 대첩에서 승리를 거두게 하였다. 정부에서도 훈련도감을 설치해 군사를 양성하기에 이르렀다.

[신분 제도의 동요]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지배 계층인 양반의 무능력이 여실히 드러나면서 이제까지의 엄격한 신분 제도가 흔들려 하층민이 노비 문서를 불사르며 자유를 부르짖는 일이 생겼다. 곧 조선 초기부터 눌려 지내기만 하던 서자 출신과 상민, 천민 사이에 새로운 자각이 싹트게 된 것이다.

[일본의 문화 발달]

전쟁을 일으킨 일본도 많은 인명을 잃고 국민들도 큰 고통을 받았지만, 이 전쟁을 통하여 수많은 우리 문화재를 약탈해 감으로써 문화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왜군이 물러가면서 우리 도자기 기술자들을 포로로 데려갔는데, 이들 덕택으로 일본 도자기 공예는 크게 발전하였다. 또 우리의 귀중한 책과 금속 활자를 빼앗아 가 학문과 인쇄술을 발달시키는 등 일본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더구나 조선 성리학자들을 통해 우리의 유학자 이황의 학설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성리학이 일본 유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동북아시아의 정세 변화]

많은 군대를 동원해 조선을 도와 일본을 상대로 싸운 명은 지나친 부담과 재정 악화로 인해 국력이 쇠약해져 각지에서 불만 세력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반면 만주에서는 여진족의 세력이 강해져 명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처럼 왜란은 동북아시아의 정세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