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화 정책 추진/조약 체결 과정/외교권의 박탈과 통감 정치/자주 독립 국가의 지위 상실

을사조약은 1905년에 일본이 한국을 침탈하기 위한 전초 단계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강압적으로 체결한 조약이다. 

[식민지화 정책 추진]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러시아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를 인정받게 되자 노골적으로 식민지화 정책을 밀고 나갔다. 

1. 보호 조약의 필요성 선전
일제는 1904년에 조직된 친일 정치 단체인 일진회를 통해 보호 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선전하였다.

2. 친일파 매수 
학부대신 이완용 등 을사 5적(을사조약 체결에 가담한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을 통틀어 이르는 말) 등을 조약 체결에 찬성하도록 매수하였다.

[조약 체결 과정]

1. 일본의 위협
일제는 보호 조약을 맺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파견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주한 일본 공사와 함께 일본군을 거느리고 궁궐에 들어가 고종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며 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2. 강압적 조약 체결 
고종 황제와 내각은 조약 체결을 정식으로 거부하였으나, 이토 히로부미는 적극 반대하는 한규설을 일본 헌병으로 하여금 회의실에서 끌어내게 한 뒤,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등의 을사 5적을 위협해 조약에 서명하게 하였다(1905년). 

3. 일본의 일방적 공포
일제는 또 정식으로 맺어지지도 않은 조약을 일방적으로 공포하였다. 고종 황제는 이 조약을 마지막까지 승인하지 않고 무효를 선언하였다.

[외교권의 박탈과 통감 정치]

을사조약의 체결로 대한 제국의 외교권은 박탈당하였고, 일제는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초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였으며, 지방에는 이사청이 설치되었다. 이른바 통감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자주 독립 국가의 지위 상실]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로 우리나라는 국가 유지에 가장 필요한 외교권을 빼앗겨 자주 독립 국가로서의 유지가 사실상 어렵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에 와 있던 외교관들은 각기 공사관의 문을 닫고 떠났으며, 각국에 주재하고 있던 대한 제국의 공관도 철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