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 간의 다툼/외척 세력의 성장/이자겸의 난/이자겸의 난에 대한 평가

안정되었던 고려의 귀족 사회는 문종 때를 고비로 점차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귀족 간의 다툼]

가문과 문벌이 경제적인 혜택과 정치적 출세의 바탕이 되었던 고려 사회에서 귀족 사이의 다툼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건국 초부터 왕실과 혼인을 맺어 온 호족 출신들은 중앙의 귀족이 된 뒤에도 다투어 왕실과 혼인을 맺고 왕의 외척으로서 세력을 부리려 하였다.

[외척 세력의 성장] 

족벌 세력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초기의 왕규를 비롯하여, 현종 이후 문종 때까지 50여 년간 권세를 쥔 안산 김씨와 문종 이래 80여 년간 권세를 누린 경원 이씨 등이다. 특히 경원 이씨의 이자연은 문종에게 딸 셋을 바치고 권세를 누렸으며, 그의 손자 이자겸은 예종과 인종에게 자신의 딸들을 바쳐 이중으로 왕실과 외척 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렸다.

[이자겸의 난]

1. 권력의 독점
왕실과의 외척 관계로 위세를 부리게 된 이자겸은 날로 교만해져 조정에서 반대파를 몰아내는 한편, 남의 토지와 재물을 강제로 빼앗았다. 또 대외적으로도 자기가 최고의 권력자인 양 행세하고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는 왕이 될 야심을 품고 인종까지 제거하려 하였다.

2. 궁궐 침입
이자겸의 세력이 커지자, 김부식 등이 임금과 신하의 구별을 엄격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크게 경계하였고, 인종도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를 눈치 챈 이자겸은 여진 정벌에 공을 세워 무인으로 출세한 척준경과 손잡고, 군대를 이끌고 궁궐에 침입해 궁궐을 불살랐다. 이어 인종을 가둔 후 그의 딸인 왕비를 시켜 인종을 독살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1126년에 일어난 이자겸의 난이다.

3. 이자겸의 몰락
이후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벌어지자 왕은 척준경을 달래 이자겸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척준경도 그 뒤 정지상 등에 의해 쫓겨났다. 

[이자겸의 난에 대한 평가]

이자겸의 난은 귀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고려 지배 체제 내의 모순을 드러낸 최초의 중앙 귀족의 난으로서, 고려 귀족 중심 사회의 동요를 잘 보여 준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