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절과 명치절/편파 보도 항의와 한일 학생 간의 충돌/대규모 가두시위

[개천철과 명치절]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1929년 11월 3일에 일어났다. 이날은 음력 10월 3일로, 우리의 개천절이자 일본인에게는 4대 국경일의 하나인 명치절이었다. 일본인들은 축제 분위기였으나, 한국 학생들은 행사를 마친 뒤 울분을 달래기 위해 시내로 쏟아져 나왔다. 

[편파 보도 항의와 한일 학생 간의 충돌]

1. 편파 보도 항의
개천절 행사 후 거리로 나온 광주 고등 보통학교 학생들은 편파적인 보도를 한 광주일보사에 몰려가 항의하였다.

2. 한일 학생 간의 충돌
우체국 앞에 있었던 한일 학생 간의 충돌을 계기로 광주역 광장에서는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다. 곧 비상 경계령이 내려져 광주 고등 보통학교 학생들은 학교 강당으로 돌아왔다.

[대규모 가두시위]

1. 여러 학교의 참여
강당에 모인 광주 고등 보통학교 학생들은 가두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는데, 곧이어 광주 농업학교 학생들도 가두시위에 참가한다고 통고해 왔다. 이에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왔고, 광주 농업학교 학생들이 뒤를 따랐다. 광주 사범학교의 한국인 학생들도 시위 대열에 합세하였다. 

2. 시민들의 호응
학생들은 "조선 독립 만세", "식민지 노예 교육을 철폐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애국가와 응원가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시민들도 호응해 거리는 완전히 한국 학생과 시민들로 메워져 있었다. 이것이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제1차 봉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