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家看到电视中的君王,有没有一种“啊,我想当君王”的想法?我有想过好几次......对......今天就将以关于朝鲜时期君王的爱情为内容来发帖。对我们来说,耳熟能详的电视剧《李算》的正祖,一辈子都喜欢着初恋——松渊(宜嫔成氏)......果然事实是这样吗?

조선 시대 왕이 여자를 들이는 목적은 유력 가문과의 결탁, 왕통의 계승이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왕은 사랑을 하지 않습니다.왕이 한 여자만을 사랑한다는 건 결코 성립할 수도 성립되어서도 안 되는 공식이었습니다.
朝鲜时期君王看女人的目的,说是和势力家族的勾结以及王统的全部继承并不过分。并不仅仅是君王的爱情。君王只爱一个女人是绝对不能成立的公式。

누구도 사랑하지 않기에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법, 이것이 바로 왕실을 지탱시키는 힘이었습니다.
任何人都不爱,因此能够爱上所有人。这正是支撑王室的力量。

하지만 영화와 TV속 조선의 왕들은 죄다 순정남에 일편단심 민들레로 각색되어서 나타나죠.
但是,电影和电视剧中全都把朝鲜的君王打造成纯情男、一片丹心的角色。

우리에게 드라마로 친숙한 <이산>의 정조는 첫사랑 송연이(의빈 성씨)를 평생토록 사랑했다는데요...
对我们来说,耳熟能详的电视剧《李算》的正祖,一辈子都喜欢着初恋——松渊(宜嫔成氏)......

과연 사실일까요?
果然事实是这样吗?

아닐 것이다, 라는 결론부터 내려놓고 정조 관련 기록들을 뒤져봤습니다.
放下“不是的”这个结论,我翻阅了和正祖相关的记录。

어찌 된 일인지, 사료 속에 등장하는 이 둘의 관계는 ‘순정’이라는 단어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是怎么回事,史料中记载的两个人关系,除了用了“纯情”单词来形容说明并没有其他说法。[/cn】

정조에게는 한 명의 왕비와 네 명의 후궁이 있었습니다. 그중 왕비와 세 후궁은 모두 사대부 출신으로 정략으로 맺어진 결혼이었죠. 나머지 한 명은 정조가 궁녀 가운데 마음에 들어 들인 후궁인데 삼았는데 바로 의빈 성씨(송연이)입니다.
[cn]对正祖来说,他有一位王妃和四位妃嫔。其中王妃和三位妃嫔全部都是士大夫出身,是政治联婚。

의빈 성씨는 세 번 회임하는데, 1782년 문효세자를 낳고 1784년 옹주를 낳으며 1786년 세 번째 아이를 임신하나 출산을 한 달 앞두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립니다.
而宜嫔成氏曾三次怀孕,1782年生下文孝世子,1784年生下翁主,1786年怀第三个孩子,在即将分娩前一个月突然离世。

의빈이 2년 터울로 아이를 갖는 동안 왕비나 다른 후궁 중에 아이를 낳은 이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정조가 의빈을 깊이 사랑했었음을 의미하죠
宜嫔成氏两年间生了两个孩子的这段间,王妃或其他妃嫔中没有一个人生孩子。这表示这正祖对宜嫔成氏有着很深的爱意。

또한 의빈이 죽은 후 왕실에서는 한동안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고 정조는 일만하는 워커홀릭이 되어버렸습니다.
并且宜嫔成氏去世后,王室里有一段时间都没有小孩出生,正祖成为整天只处理事务的工作狂。

사료 속에 등장하는 정조는 매우 주도면밀하고 신중하며 감정을 거의 내비치지 않은 철혈 군주입니다. 열한 살에 아버지를 잃고, 온갖 모함과 살해 위협을 이겨내고, 변덕스러운 할아버지의 역정을 견뎌낸 끝에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이러한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史料中记载的正祖为人十分细致周到和做事慎重,是一位几乎不会透露自己的感情的冷血的君主。十一岁时父亲去世,遭遇各种陷害和生命危险,经受过善变的爷爷的恼火,最后终于成为君主,也是造就他这种性格的原因。

여자에게도 목석같았던, 평생 일밖에 몰랐던 군주의 마음을 녹이고 들어가 깊은 곳에 자리 잡았던 유일한 여자가 바로 의빈 성씨였던 것입니다.
他对女人也像对着一块石头一样,而唯一一位融化和进入这一位一生中除了工作之外什么都不理的君主的内心的女人,正是宜嫔成氏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무덤은 원래 효창공원이 자리한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있었습니다.
文孝世子和宜嫔成氏的墓地原本是孝昌公园,位于首尔龙山区的孝昌洞。

문효세자가 요절한 지 4개월 뒤에 의빈 성씨마저 세상을 떠났고 정조는 문효세자의 무덤 근처 산등성이에 어미를 묻어주었습니다. 이 모자의 무덤을 수호하는 사찰로 북한산 승가사가 지정되었죠.
文孝世子夭折四个月后,宜嫔成氏也去世,正祖将文孝世子墓地附近的山脊用来埋葬宜嫔成氏。建立了北汉山僧伽寺来守护这两母子的墓地。

그러다 1944년 일제가 효창원을 도시공원으로 개발하면서 효창원 일대에 있던 왕실 묘들을 일제히 서삼릉 쪽으로 이전하게 됩니다. 해방 이후 이곳은 독립운동가들의 추모 공원으로 조성되었습니다.
然后1944年日本帝国主义把孝昌园作为市区公园,孝昌园一带的王室墓地一齐被搬到西三陵。解放以后这个地方建设成独立运动者追悼公园。

효창원의 조포사인 승가사는 효창원과 약 12킬로미터 떨어진 먼 거리에 있습니다.
孝昌园吊唁的僧伽寺和孝昌园距离大约是12公里远的路程。

원래 조포사는 무덤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찰로 정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왜 멀고 먼 승가사가 지정되었을지는 사료가 전무하고 전승되는 설화조차 없다고 합니다.
原先的吊唁寺一般是选在墓地最进的地方,但是为什么僧伽寺选在这么远的地方,史料中毫无记载,甚至连相关的故事都没有。

더구나 의빈 성씨의 자식들은 모두 요절했기 때문에 더욱 자료가 빈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再加上因为宜嫔成氏的子女全部都夭折,所以详细地没有更加详细地史料。

다만, 승가사가 약사도량으로 명성이 높았으므로 문효세자나 의빈 성씨가 병이 들었을 때 이곳에서 기도를 올렸을 것으로 짐작할 뿐입니다.
只是,僧伽寺作为寺庙法场很有名,有人推测文孝世子或者宜嫔成氏生病的时候都会在这个地方祈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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