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에 전국의 학생과 국민들이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부정부패, 부정 선거 등에 항의해 일으킨 민주 혁명.

[6·25 전쟁 당시의 부정부패]

우리 민족은 6·25 전쟁으로 정치·경제·사회의 혼란 속에서 어려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한 가운데 근대 민주 정치의 미숙과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자유당 정권의 독재 정치로 말미암아 사회가 극도로 불안해져 갔다. 자유당은 당시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정권을 이끌어 가기 위해 야당을 탄압하고 국민의 뜻에 어긋나는 정치를 펴 나갔다. 그러한 자유당의 독재 정치와 그들의 극심한 부정부패에 대해 국민들의 불만은 매우 컸지만, 이를 경찰력을 동원해 강제로 억압하였다.

[부산 정치 파동]

1952년에 정부가 부산으로 옮겨 갔을 당시, 여당인 자유당은 제2대 대통령 선거를 몇 달 앞두고 야당을 탄압하면서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로 고쳤다. 국회를 통한 간접 선거로는 이승만 대통령이 재당선될 가망이 없자, 민주 정치 경험이 없는 국민의 직접 선거가 여당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인데, 이를 부산 정치 파동이라 한다. 그 결과 이승만이 또 다시 대통령 자리에 앉게 되고, 민주 정치는 수난기를 맞이하였다.

[4사5입 개헌]

그 뒤 이승만 대통령은 자기 당에 유리하도록 헌법과 선거법 등을 고치고 무질서한 정치를 감행하였다. 1954년에는 초대 대통령에 한해 다시 대통령에 입후보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헌법을 고치려 하였다. 결국 이 헌법을 개정·통과시켜, 이승만이 다시 3선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4사5입(四捨五入) 개헌이다.

자유당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앤다는 내용의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으나, 표결에 붙인 결과 찬성표는 135표로 1표가 부족해 부결되었다. 하지만 이틀 뒤 국회 재적 의원 203명의 3분의 2를 4사5입하면 135명이 된다고 하여 가결을 선포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헌정사에 큰 오점을 남긴 개헌이었다. 4사5입은 4는 버리고 5는 취한다는 뜻으로, 반올림과 같은 뜻이다.

[4·19 혁명]

이러한 독재 정치는 마침내 막바지에 올라 선거에까지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고 부정과 부패를 저질렀다. 1960년 3월 15일의 대통령 선거가 바로 그것이다. 한편 자유당의 독재 정치가 계속되자 국민들의 불만은 쌓일 대로 쌓여, 드디어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학생 시위가 일어났다. 이어 선거일인 3월 15일에는 마산에서 부정 선거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가 일어났으며, 자유당의 지시를 받은 경찰은 시위 학생들을 폭력적으로 마구 다루었다. 이에 격분한 서울의 각 대학 학생들로부터 고등학교 학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궐기해 독재 정권 타도와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4·19 혁명을 일으켰다. 각 지방 도시에서도 시민들의 불만과 불평이 잇따라 터져 전 국민적 혁명 운동으로 번져 나갔다. 이렇게 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자리에서 물러나고, 자유당 독재 정권은 12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4·19 혁명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 민주 정신의 표현이자 근대 민주 정치 발전을 위한 최초의 혁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