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자들의 싸움에 지쳐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고향인 함흥으로 가 있을 때 태종(방원)이 보낸 차사를 죽이거나 가두어 돌려보내지 않은 일.

[함흥차사의 유래] 왕자의 난으로 형제 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거듭되자 태조 이성계는 세자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고향인 함흥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정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태종(방원)이 사신을 여러 번 보냈는데, 이성계는 그들을 죽이거나 가두어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때부터 어디론가 갔다가 돌아오지 않을 때 비유적인 표현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 바로 '함흥차사'이다. 원래는 함흥으로 간 차사라는 뜻이다.

[함흥차사에 얽힌 일화] 보내는 사신마다 도무지 소식이 없자 태종은 다시 판중추부사 박순을 함흥에 보냈다. 박순은 이때 새끼 딸린 암말을 타고 함흥으로 가서 망아지는 멀리 매어 놓은 채 어미 말만 타고 태조에게 갔다. 어미 말이 구슬피 울자 태조가 궁금해 하며 사연을 물었다. 박순이 대답하기를, "새끼 말을 멀리 매어 놓고 왔더니 모자 간의 정을 이기지 못해 그러는가 봅니다"라고 하였다. 이어 태종을 용서하고 한양으로 돌아가기를 간곡히 아뢰니 마침내 태조의 마음이 움직였다. 이튿날 박순이 한양으로 길을 떠나자 태조의 신하들이 그를 살려 둘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태조는 하는 수 없이 그가 강을 건넜으면 살려 주고 그렇지 않으면 죽이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박순은 강을 건너지 못해 결국 죽고 말았다. 그 뒤 무학 대사가 찾아가 돌아가도록 강력히 설득해 태조는 마침내 한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