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봉기의 배경/농민 봉기/사원의 폐단

[농민 봉기의 배경]

신라 말기의 정치적·사회적 혼란은 진성 여왕 이후 더욱 심해져 수습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1. 귀족들의 사치와 조세 수입의 감소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이 도를 더하면서 비용은 늘어난 대신 이를 뒷받침할 조세의 수입은 계속 줄어들었다. 지방 호족 세력들이 자립해 농민들로부터 직접 조세를 거두어들였기 때문이다.

2. 농민들의 조세 부담 증가
진성 여왕 때에는 나라의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농민들에게 세금을 독촉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정부의 세금 독촉은 농민들에게 이중의 부담을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곧 농민들은 자기가 속한 지방의 호족뿐 아니라 나라에도 세금을 바쳐야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점점 살기 어려워진 농민들은 귀족이나 사원의 노비가 되거나 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저항하였다.

[농민 봉기]

1. 원종과 애노의 난
농민 반란의 첫 봉화를 든 것은 경상도 상주 지방에서 일어난 원종과 애노로, 이들의 난을 원종과 애노의 난으로 부른다. 이 난은 그 세력이 상당히 커 나라에서 보낸 진압군이 감히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였다. 그 뒤 각지에서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2. 여러 지역의 농민 반란
북원의 양길, 죽주(지금의 이천)의 기훤, 완산(지금의 전주)의 견훤, 양길의 부하 궁예 등이 대표적인 반란군의 우두머리였다. 이 밖에도 초적이라 하여 이름 없는 농민 반란군이 수없이 일어났다.

[사원의 폐단]

신라 말기에는 사원의 폐단도 갈수록 심해졌다.

1. 사원의 문제점
나라의 보호를 받으면서 발달한 사원은 귀족이나 왕실로부터 기부를 받은 토지나 노비에 의해 재산을 모으기도 했으나, 사원 자체가 직접 농민들로부터 토지를 빼앗아 농장을 확대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사원은 세금을 내지 않는 특권이 있었기 때문에 나라에 아무런 부담도 지지 않고 재산을 늘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큰 사원이 하나의 현 전체를 농장으로 지배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불교 사원은 귀족들이 재산을 숨기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2. 사원 개혁의 실패
사원의 폐단은 나라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는 큰 요인이 되었다. 당시 최치원 같은 도당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은 이러한 폐단의 시정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탄압을 받거나 배척당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폐단으로 신라 사회는 서서히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