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투쟁/반대 상소/순국 자결

을사조약(1905년)의 내용이 나라 안에 알려지자 전국적으로 항일 저항 운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지식인들은 이 조약의 체결을 곧 망국으로 단정하고 민족적 항쟁을 벌였다. 

[언론 투쟁]

<황성신문>은 을사조약이 일제의 무력에 의해 강압적으로 체결된 것을 폭로하고, 장지연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었다. 장지연은 이 글에서 일제의 침략을 공박하는 동시에, 당시의 매국 대신들을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이로 인하여 <황성신문>은 무기 정간을 당하였다.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도 을사조약 반대 운동을 상세히 보도해 민족 정신을 불러일으켰다.

[반대 상소] 

1. 일본 규탄과 주권 회복 상소
전국 각지에서 일본을 규탄하고 우리의 주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상소문이 빗발치듯 올라왔다. 이상설, 안병찬, 조병세, 최익현, 이근명 등이 상소 운동을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2. 국민들의 저항
(1) 군중들의 분노도 대단하여, 수십만 군중이 조약 찬성자인 총리대신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질렀으며, 조약이 조인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고, 각급 학교 또한 휴교를 단행하였다.
(2) 나철·오기호 등은 5적 암살단을 조직해 매국노의 처단을 시도하는 한편, 일제의 앞잡이가 된 일진회 사무실을 습격하였다.

[순국 자결]

1. 애국 지사의 자결
일본의 침략에 격분해 많은 애국지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영 공사 이한응은 영국 정부가 우리의 요구를 묵살하고 냉대를 하자 자결하였고, 홍만식과 민영환, 조병세 등도 자결을 통해 국민들의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다. 

2. 민영환의 순국 항쟁
특히 민영환의 순국 항쟁은 온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매국노의 처단과 조약의 무효를 주장한 두 차례의 상소가 아무런 성과가 없자, 고종과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할복 자결하였다. 민영환이 남긴 유서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은 온 국민의 항일 운동을 촉발하는 구실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