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회의 발전과 대립] 로마 제국의 국교로서 기반이 튼튼하게 다져졌던 크리스트교는 민족 대이동의 혼란기를 겪으면서도 발전을 계속하였다. 더욱이 게르만 족의 국가…

[로마 교회의 발전과 대립] 로마 제국의 국교로서 기반이 튼튼하게 다져졌던 크리스트교는 민족 대이동의 혼란기를 겪으면서도 발전을 계속하였다. 더욱이 게르만 족의 국가로서 서유럽 중심부에 자리 잡은 프랑크 왕국이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삼았기 때문에 교세는 더욱 커졌다. 크리스트교의 발전에 따라 각지에 세워진 교회 중에서도 서유럽 사회에 뿌리를 내린 로마 교회와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가장 세력이 컸다. 따라서 이 동·서방 교회는 서로 대립 상태를 이루었다. 로마 교회는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가 세웠다 하여 베드로의 후계자임을 내세워 주교를 교황이라 이르고 모든 교회를 지배하려 하였다. 6세기 말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게르만 족에 대한 전도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여 각 지방 교회에 대한 지배력을 한층 강화하였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로 동로마 황제의 지배하에 들어갔기 때문에 동로마 황제는 동방 교회의 우두머리(총주교)를 겸하면서 로마 주교(교황)에 대해서도 복종을 강요해 왔다. 로마 교회는 이를 못마땅히 여겼으며 교리상으로도 동방 교회와 의견이 엇갈려 있었다.

[성상 숭배 금지령과 로마 교회의 분열] 동·서 교회의 대립은 동로마 황제 레오 3세가 내린 성상(聖像) 숭배 금지령을 계기로 격화되었다. 그동안 하느님이나 예수의 상을 만들어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옳으냐에 대한 논쟁이 거듭되어 왔는데, 레오 3세는 결단을 내려 이를 금지시키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게르만 족에게 포교하는 데에는 성상을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 로마 교회는 이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로마 교황은 프랑크 왕국과 손을 잡고 동방 교회에 대항해 나가다가 11세기 중엽에 이르러 서방의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의 그리스 정교회로 완전히 분열되었다.
 
[그리스 정교] 동로마 제국의 국교로서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발전한 가톨릭의 한 파이다. 1054년에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로마 교회에서 분리되어 각국의 자립 교회로 다시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