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거란, 송과의 관계/거란 침입의 배경/거란의 1차 침입/거란의 2차 침입/거란의 3차 침입/승리의 요인/전란의 영향

[고려와 거란, 송과의 관계]

1. 고려와 거란 관계
(1) 고려는 태조 이후 거란과 강경하게 맞서서 북진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태조는 '훈요 10조'에서 후손들로 하여금 거란과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였고, 고려와 화친하고자 거란이 보내온 낙타를 만부교 아래에 버려 굶어 죽게 하기도 하였다. 
(2) 정종 때에는 도읍을 서경으로 옮기려고 큰 공사를 일으키는 한편, 거란에 대비해 광군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3) 광종 때에도 청천강 이북에 여러 성을 쌓았다.

2. 고려와 송과의 관계
국교를 원하는 거란은 배척하면서도 거란과 다투고 있던 송과는 광종 이후 친교를 맺었다.

[거란 침입의 배경]

거란은 고려가 송과 손을 잡고 거란을 배격하자 이를 탐탁하지 않게 여겼다. 이러한 때에 발해 유민들이 압록강 중류 지역에 세운 정안국이 고려와 연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거란은 먼저 정안국을 무찌른 다음 고려로 침입해 왔다.

[거란의 1차 침입]

1. 1차 침입의 원인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먼저 고려를 눌러 뒷걱정을 막으려 한 거란은 나라 이름을 요로 고치고, 정안국을 토벌한 뒤인 993년(성종 12년)에 소손녕을 앞세워 고려에 쳐들어왔다. 

2. 서희의 외교 담판
(1) 성종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이를 맞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그러자 서희가 혼자 적진으로 들어가 소손녕과 외교 담판을 벌여 이들을 물리쳤다. 
(2) 서희는 고려가 앞으로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을 배척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거란군을 스스로 물러가게 한 뒤 압록강 유역을 얻어 그곳에 강동 6주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오히려 땅을 얻어 국경이 압록강까지 이르렀다.

[거란의 2차 침입]

1. 2차 침입의 원인
거란의 1차 침입 후 고려는 거란과의 국교 수립을 약속했으나 적극적으로 실행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송과의 관계도 계속 유지하려 하자 거란은 다시 침입할 기회를 노렸다. 이러한 때에 마침 고려에서는 강조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세우는 정변이 일어났다. 거란은 이를 구실로 다시 쳐들어왔다.

2. 양규의 활약
고려는 거란군을 맞아 잘 싸웠으나 강조가 패하여 개경까지 함락되고, 현종은 나주로 피란하였다. 그러나 양규가 돌아가는 거란군의 길목을 막아 이를 격파하였다.

[거란의 3차 침입]

1. 3차 침입의 원인
거란은 2차 침입 후 고려에 대해 사대의 예를 갖출 것과 강동 6주를 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가 이를 거절하자 거란은 소배압을 앞세워 현종 9년에 10만 군사를 이끌고 또다시 쳐들어왔다. 

2. 강감찬의 귀주대첩
거란군은 개경 근방에까지 이르렀으나,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거의 전멸시켰다. 이때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수천 명으로, 이 싸움이 유명한 귀주 대첩이다.

[승리의 요인]

거란은 그 뒤에도 자주 침입해 국경 지대에서 충돌이 잦았으나 그때마다 고려는 모조리 격퇴하였다. 고려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건국 초부터 북진 정책을 내세워 국방을 튼튼히 하고 문물 제도를 정비해 나라의 힘을 길렀기 때문이다.

[전란의 영향]

1. 주변국 간의 평화적 관계 형성
세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후 고려는 거란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또 거란은 고려가 두려워 송으로 침입하지 못함으로써 고려와 송, 요나라 사이에는 한동안 평화적인 관계가 유지되었다.

2. 북방 민족 침입에 대비
전란이 끝난 이후에도 고려는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한 방비에 소홀하지 않았다. 
(1) 현종은 강감찬의 건의를 받아들여 개경 주위에 나성(도시 전체를 둘러싼 성)을 쌓도록 하였다.
(2) 덕종 때에는 북쪽 국경 지대에 장성을 쌓았는데, 이 성이 압록강 입구에서 영원 등 열네 고을을 거쳐 함흥의 도련포에 이르는 고장성(천리 장성)이다.
(3) 거란의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막자는 염원과 문화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을 실어 대장경을 만들어 국민들의 호국 정신을 일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