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예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朝鲜王朝时期的艺人是如何生活的呢?

광대 × <왕의 남자>
戏子×《王的男人》

2005년 말에 개봉해 1000만 관객 몰이로 흥행 신드롬을 일으킨 <왕의 남자>(감독 이준익)는 조선 초기 연산조의 정치적 상황 속에 광대라는 인물을 묘하게 섞어 넣어 매우 빼어나게 만든 팩션 작품이다.
2005年年底上映的电影《王的男人》(导演李俊益),动员了1000万观众,掀起了超高票房。这是一部在朝鲜初期燕山君的政治局势中,巧妙地添加了戏子这样的人物而制作的虚构作品。

공길(이준기 분)의 마성적 매력과 장생(감우성 분)의 예술혼과 광대들의 공연 장면으로 시종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영화 <왕의 남자>는 공길이 궁중에 발탁되면서 임금(정진영 분)과 공길과 장생, 이 세 명 사이에서 생긴 미묘한 감정선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장생은 허구의 인물이지만 임금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과 공길은 실존했던 인물이다.
孔吉(李准基饰)的魔性魅力,张生 (甘宇成饰)的艺术精神和戏子们的表演场面,让人目不转睛。电影《王的男人》以孔吉被选入宫中,皇上(郑进永饰)和孔吉、张生这三个人之间发生的微妙的感情线为中心展开。虽然张生是虚构人物,但皇上燕山君(1494~1506在位)和孔吉是实际存在的人物。

영화 <왕의 남자>는 겉으로는 폭군이지만 그 이면에 가련한 정체성을 가진 왕의 초상을 광대의 연회를 통해 보여 준다.
电影《王的男人》中,皇上虽然表面上是暴君,但通过戏子的宴会展现了一个有着可怜身份的王的双重形象。

조선 시대 광대들은 매우 미천한 위치에 있었지만, 나례에 동원 되어 공연을 하는 중요한 예인이었다. 나례는 원래 음력 섣달그믐에 하는 국가적인 액막이 행사인데 중국의 사신 영접이나 왕의 개인적인 연회 등에서도 행해졌다. 이 행사에 전국에서 실력 있는 광대들이 불려 나왔다.유랑 예능인 집단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있었다. 이 집단을 고려 시대에는 양수척(楊水尺), 재인(才人)이라고 불렀다. 떠돌면서 공연하는 이들이 때로는 도축을 해 주고 밥을 받아먹었다.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이렇게 산 것은 이들이 한반도 토착민이 아니라 8~9세기경 북방에서 들어온 유목민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여진족이 많았지만 그중에는 타타르인들도 있었다.
在朝鲜王朝时期,戏子的身份很卑微,却是参加了傩礼,并且进行表演的艺人。傩礼本来是阴历除夕举行的国家性的驱魔活动,在中国迎接死神或举行国王的个人宴会等活动上也举行该仪式。这个活动会招请来自全国各地的有名的戏子。流浪艺人团体从统一新罗时代开始就有了。这个集体在高丽时代被称为杨水尺、才人。四处漂泊表演的他们,有时会屠宰牲畜来吃。因为这样不定居在一处生活的他们不是韩半岛的土著民,而是8~9世纪左右从北方流入的游牧民团体。虽然有很多人是女真族,但里面不乏有鞑靼人。

김홍도의 <평양감사 향연도> 일부, 국립중앙박물관. 계단과 공연장에 사자탈을 쓴 광대가 있다.
金弘道的《平壤监察盛宴》的一部分,国立中央博物馆。台阶和剧场都有戴狮子面具的戏子。

조선 초에는 이들을 정착시키려는 시도로 신분을 승격해 주기도 했지만, 하는 일이 변하지 않아 차별은 여전했다. 일부 양수척은 한양에 정착해서 성균관 제사에 필요한 도축을 하는 반인(泮人)으로 변신해 성균관 인근에 반촌(泮村)을 형성하고 살았다. 그들은 도축업과 경중우인(京中優人: 우인은 재인과 같은 말로, 서울에 사는 우인이라는 뜻)을 겸해 한양에서 그때그때 필요한 공연도 한 것 같다. 공길이 바로 이런 경중우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공길에게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온 타타르인의 피가 섞여 있었다면 그는 영화 속 공길처럼 수려하고 당당한 풍채에 왕 앞에서 단독 공연을 할 정도로 총애받는 예인이었을 것이다.
朝鲜初期虽然试图让他们安顿下来而提升了他们身份,但由于从事的工作没有改变,所以歧视依然存在。部分杨水尺定居汉阳,变身屠宰牲畜供成均馆祭祀的泮人,生活在成均馆附近形成一个泮村里。他们既是屠宰业,又是京中優人(優人跟才人一样的意思,指的是居住在汉阳的才人),好像时不时在需要的时候在汉阳演出。如果孔吉含有从中亚横渡鞑靼人的血,那么就是像电影中的孔吉一样,以秀丽又堂堂正正的风采在王面前单独演出,算是备受宠爱的艺人。

기생 × <황진이>
妓生×《黄真伊》

2007년에 개봉한 <황진이>(감독 장윤현)의 독특한 점은 북한 소설가 홍석중의 『황진이』가 원작이라는 데 있다. 홍석중은 소설 『임꺽정』으로 우리 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벽초 홍명희(洪命憙, 1888~1968)의 손자로 북한에서 현재까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견작가다. 홍석중의 『황진이』는 조선 시대 양반의 시각에서 전승되던 황진이에 관한 이야기를 해체하고, 가공인물 ‘놈이’를 황 진사 댁 노비로 내세워 그와 기생 ‘황진이’의 비극적 사랑을 그려 낸다.
2007年上映的《黄真伊》的独特之处是改编自朝鲜小说家洪锡中的《黄真伊》。洪锡中是通过小说《林巨正》在我们文学史上划下重重一笔的洪命憙的孙子,是至今在朝鲜一直活跃着的中坚作家。洪锡中的“黄真伊”从朝鲜时代两班的视角拆解了传承下来的黄真伊的故事,加入了虚构人员“奴”为黄进士家的奴婢,描写他和妓生黄真伊的悲剧爱情。

영화에서는 자신이 양반인 줄 알았던 황진이가 노비 출신 첩의 딸이라는 출생의 비밀을 알고 나서 기생이 되는 것으로 나온다. 기생, 즉 기녀는 천민 계급에 속했다. 그러므로 황진이가 기생의 길을 택한다는 것은 스스로 천민 신분으로 내려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电影中曾以为自己是贵族的黄真伊知道了自己其实奴婢出身的妾氏所生,了解出生的秘密后成为妓生。妓生即妓女属于贱民阶级。所以黄真伊选择妓生之路意味着降低自己身份至贱民。

영화 <황진이>에서. 조선 중종 때 기생 황진이는 조선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예술가들의 예술가’다.
在电影《黄真伊》中,朝鲜中宗时期的妓生黄真伊是从朝鲜时代到现代,给过很多艺术家灵感的“艺术家们的艺术家”。

조선은 남성의 성적 방종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하면서도 여성들은 정조 관념으로 옭아매어 성적으로 억압하는 사회였다. 특히 교육을 받은 여성, 즉 양반가의 여성들은 규방(閨房)이라는 공간에 갇혀서 자신들의 재능과 욕망을 거세당한 채 식물처럼 살다 죽어야 했다. 그에 비해 신분은 낮지만 양반가 규수 정도 혹은 그 이상의 교양을 쌓을 수 있고 삶의 폭도 비교적 넓은 사람들이 바로 기생이었다.
朝鲜是一个对男性的性放纵比较宽容,但女性却被贞操观念束缚着的性压制的社会。特别是受过教育的女性,即两班女性,必须被关在一个叫做闺房的空间里,把自己的才能和欲望阉割掉,像植物一样向死而生去。相比之下,虽然身份低,但是却有着两班闺秀的教养,甚至更高,生活范围也比较广阔的人就是妓生。

신윤복의 <청금상련>, 《혜원전신첩》, 간송미술관. 조선 시대 기생은 어디까지나 남성들의 성적 노리개로 소비되던 불우하고 슬픈 계급의 여인들이었다.
申润福的《聽琴賞蓮》《惠園傳神帖》,甘宋美术馆。朝鲜王朝时期,妓生是无论到哪里都是被作为男人的性奴隶,不幸的悲伤阶级的女人们。

기생은 노비, 그중에서도 사치(奢侈)노비에 속했다. 주로 풍류를 즐기는 데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번 기적(妓籍)에 올라가면 노비와 마찬가지로 천민이라는 신분적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천한 일을 한다 해서 팔천(八賤)에 들어갔다. 팔천은 양인보다 낮은 여덟 가지 천한 신분, 즉 사노비·승려·백정·무당·광대·상여꾼·기생·공장(工匠: 수공업에 종사하던 장인. 관공장官工匠과 사공장私工匠으로 나뉜다)을 일컬었다.
妓女属奴婢,其中属于奢侈奴。因为主要是享受风流才需要。一旦纳入妓籍,像奴婢一样,摆脱不了平民身份的束缚,干了粗活就进了八贱。八贱是比良人身份低的8种低贱的身份,即从事沙奴、僧侣、屠夫、巫婆、戏子、商人、妓生、工匠的人。工匠又分为官工匠和私工匠。

오늘날 사람들은 황진이나 매창(梅窓) 등 문예로 이름을 드날린 기생 때문에 조선 시대 기생을 전문직 여성 혹은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은 탁월한 여성 직업인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조선 시대 기생은 어디까지나 남성들의 성적 노리개로 소비되던 불우하고 슬픈 계급의 여인이었다.
如今,因为黄真伊、梅窓等靠文艺而扬名的妓生,人们经常把朝鲜时代的妓生误认为是专业女性或突破时代限制的优秀女性职业。但是朝鲜王朝时期的妓生,不管到哪里,都是被作为男人的性奴隶的不幸和悲伤阶级的女人。

도화서 화원 × <미인도>
图画署 画员×《美人图》

조선 후기 풍속화 가인 신윤복(申潤福, 1758~?)이 여성이라는 설에 기대어 만들어진 영화 <미인도>(2008년 개봉, 감독 전윤수)는 가문의 영광을 위해 여성성을 감추고 남자가 되어야 했던 신윤복(김규리 분)이 강무(김남일 분)와 사랑하며 자신의 본성과 예술적 개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는 여기에 18세기 말 정조 대 초기의 사회상과 다소 경직된 문화 정책 속에서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들이 느끼는 고뇌 등을 잘 섞어 넣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윤복이 여자였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없다.
依据朝鲜后期风俗画 画家申润福(1758~?)是女人这一说法制作的电影《美人图》(2008年上映,导演全允秀)讲述了为了家族荣耀而要隐瞒女性身份,变身成为男人的申润福(金圭丽饰)与姜武(金南佶饰)相爱,寻找自己本性和艺术个性的故事。电影里加入了18世纪末正祖代初期的社会中多少有些僵硬的文化政策下有着自由灵魂的艺术家们感到的苦恼等。可令人遗憾的是没有证据表明申润福是女子

신윤복은 김홍도, 김득신(金得臣, 1754~1822)과 더불어 조선의 3대 풍속화가로 불린 인물이다. 그는 풍속화뿐 아니라 중국 남종화(南宗畫: 수묵水墨과 담채淡彩를 써서 내면세계의 표현에 치중한 그림 경향)풍 산수화나 새와 짐승을 그리는 데도 뛰어난 직업적인 화가였다고 알려져 있다.신윤복 개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지만 그의 집안은 조선 후기 화가 가문으로 꽤 유명했다. 신윤복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조부도 화원이었고, 작은할아버지도 당대 유명 화원이던 신일흥(申日興)이다. 말하자면, 신윤복은 가계로부터 재능을 물려받은 모태 화가였다고 할 수 있다.
申润福和金洪道、金得臣(1754~1822)一起被称为朝鲜的三大风俗画家。据说他不单是风俗画家,还擅长画南宗画(南宗画:侧重于使用水墨和淡彩来表现内心世界)山水画、鸟儿、野兽等的专业画家。虽然关于申润福个人信息并不为人知,但是他的家族是朝鲜后期颇有名气的画家家门。不仅是申润福的父亲,祖父也是画员,叔叔也是当代著名画员申日兴。换句话说申润福是继承了家族才能的母胎画家

영화 <미인도>의 한 장면. 신윤복 여성설은 그의 그림이 다른 남성 화가의 그림에 비해 선이 가늘고 섬세하며 소재가 주로 남녀의 사랑 이야기라는 점 때문에 생긴 가설이다.
电影《美人图》中的一个场面。申润福是女性一说是因为他的画比其他男性画家的画要纤细细腻,再加上素材主要是男女的爱情故事而引起的假设。

조선 시대 화원은 중인 계급으로, 도화서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큰 출세였다. 도화서 화원은 주로 국가 행사와 왕의 초상화를 그리 는 기록화가로서 활동했다. 오늘날 국가 공무원으로 일하는 기록사진가와 같다고 할까? 이들은 개인의 취미와 의뢰에 따라 산수나 화조, 풍속을 그리기도 했다. 화원의 개인적 그림은 도화서 인근에 있던 그림 가게에서 팔려 나갔다. 당시 정식 그림 가게가 있었다는 것은 그림을 향유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다
朝鲜王朝时期画员是中等阶级,进入图画署是最大的成功了。图画署画员主要是作为记录国家活动和绘制王的肖像画的“记录画家”而活动。放到当今社会就是作为国家公务员工作的记录摄影师一样。他们还根据个人的爱好和委托画山水,花鸟,风俗。画员的个人画作就在图画署附近的画店里向外售卖。当时有过正式的画店,这就意味着有很多玩画的人。

도화서는 한성부 중부 견평방(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견지동)에 있었다. 그리고 중인인 화원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은 종6품 별제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도화서에 그림을 배우는 생도 열다섯 명을 배치해 화원을 양성하게 하고, 국가의 각종 의식이나 행사 그림과 초상화 그리는 일을 담당하게 했다. 1746년(영조 22)에는 화원의 임무가 증대되면서 생도가 서른 명으로 늘었다.
图画署在汉城府中部的甄坪坊(今首尔市钟路区坚志洞)。并且作为一名“中人”的画员可以登上的最高官职是宗六品。根据《经过大典》,图画署还安排了十五名学画的学生,培养成画员,负责绘画国家各种仪式、活动画和肖像画。1746年(英祖22),随着画员的任务扩大,学生人数增至三十人。

신윤복의 <선술집>, 《혜원전신첩》, 간송미술관. 남성적이고 토속적인 김홍도에 비해 신윤복은 섬세하고 세련된 필치로 도회적인 소재를 그렸다.
申润福的《宣酒馆》,《惠園傳神帖》,甘宋美术馆,与男性化,风俗化的金洪道相比,申润福以细致干练的笔锋画出了都市的素材。

영화에서처럼 신윤복이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대대로 화원을 배출한 그의 가문과 그가 그린 그림의 성취도로 보아,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하지만 자유분방한 인간의 감정을 담은 그의 그림이 당시 유교 이념을 중심으로 문화를 이끌어 가고자 하던 정조의 문화 정책과 맞지 않아 도화서에서 쫓겨났을 것이라는 속설이 전한다. 영화 <미인도>도 이 부분을 주요한 갈등의 축으로 삼는다.
就像电影中出现的一样,不能确定申润福是在图画署作为画员活动。只是从世世代代培养画员的他的家族和他画画成就度来看,图画署作为画员活动的可能性很高。但是据说他的画饱含了自由奔放的人类的情感,不符合当时正祖想要引领的以儒教理念为中心的政策,因此才被从图画署中赶出来。电影《美人图》也将此部分作为主要矛盾点。

相关阅读

因戏生情,这对韩国情侣公开恋爱后“大秀恩爱”

盘点恋爱后光速分手的情侣

盘点恋爱长跑后分手与别人闪婚的明星

本翻译为沪江韩语原创,严禁转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