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学,就是用语言塑造形象反映社会生活,又用极强烈的感染力影响社会生活。我们为具备一定阅读基础的童鞋准备的韩国文学名作大餐,希望大家提高阅读的同时,感受这些文学作品中的优美文字感情和艺术表现手法。

일락서산17 — 이문구
日落西山17 — 李文求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를 팔순이 훨씬 넘은 극노인 할아버지를 위해 미리 마련해 둔 상수(喪需, 초상 치르는 데 드는 물건)들이었다. 옻칠을 했다는 시커먼 관이며 수의 보따리를 볼 적마다, 나는 문득 공포(功布, 관을 묻을 때 관을 닦는 삼베 헝겊)를 앞세우고 검은 테두리의 앙장(仰帳, 천장이나 상여 위에 치는 휘장)을 펄럭이며 집 앞의 신작로로 드물지 않게 지나가던 상여(喪輿)를 연상하였다.
这都是为了已经年逾八十,不知道什么时候会出什么事的老太爷提前准备的葬礼用品。每当我看到涂了漆的黑色棺材和寿衣包袱,就会突然联想起跟在功布[4]后面飘动着的黑边幔帐,以及经常路过我家门前大马路的丧舆。

그러면서 나는 일쑤 공포감에 휩싸이며 그런 불길한 마음을 떨쳐 버리려고 진저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所以我经常被恐怖感笼罩着,我不得不努力挣扎着摆脱掉这种不祥的思绪。

6·25가 난 해에 우리 집은 망했다. 전쟁의 참화를 우리처럼 혹독하게 입은 집도 드물리라 싶은 쑥밭이었다.
6·25战争爆发那年,我家破产了。几乎没有比我家遭受的战争灾难更严重的了――庭院变成了一片荒地。

할아버지는 그해 섣달에 세상을 떠나셨다. 아들과 큰손자를 앞세우고 떠난 거였다.
那年12月,爷爷离开了人世。他是跟在儿子和大孙子之后去世的。

사랑마루엔 삼 년 동안 거적과 대지팡이〔상장(喪杖, 상제가 짚는 지팡이)〕가 놓여 있었고 말꼬지(?의 베 중단은 목매단 시신처럼 맥없이 늘어져 있었다. 물론 내가 사용하는 것들이었다.
厢房地板上的草帘子和孝子杖一直放了三年,内袍就像上吊了的尸体一样悬挂在那里。当然是我在葬礼时用过的。

할아버지의 임종을 못 한 건 가족 중에 나 혼자뿐이었다. 피난처에서 미처 귀가하기 전에 그런 큰일을 당한 거였다. 숙환이나 급환으로 돌아가신 건 아니었고, 말년에 참혹한 꼴만 거듭 당한 뒤여서 노쇠해진 정신을 가누지 못한 게 원인이었으리라 싶다.
全家人中没有给爷爷送终的,只有我一个人。我从避难处还没来得及赶回家的时候,家里就出了这件大事。爷爷不是因为宿疾或急病去世的,可能是晚年遭到几次惨祸之后,精神上无法重新振作起来而逐渐衰弱下去才去世的。享年90岁。

향수(享壽, 누린 수명)는 아흔. 사자(使者)를 맞아 마지막 숨을 거두며 남긴 유언은, “부디 족보만은 잘 간수해야 허느니라…….”
恭候死神的临终前,他留下了遗言:“一定要把族谱保管好……”

단 한마디뿐이었다. 족보. 그것은 완전히 망해 버린 가문을 최후까지 지켜 보다 떠난 할아버지에게는 논문서나 집문서보다도 소중한 가산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只有这一句“族谱”。对于直到临终仍守着完全衰败的家门的爷爷来说,族谱似乎是比地契或房契更宝贵的家产。

모든 것을 잃고 열한 평짜리 아파트에 의지하고 사는 지금도, 나는 수십 년 동안 증보(增補, 더 보태거나 보충함)조차 안 한 그 족보만은 어떤 물건보다 소중하게 간수하고 있지만.
我失去了所有一切,直到如今住在十一坪大的公寓里,只有数十年来没有增补过的族谱保管得比什么都珍贵。

그 세보(世譜, 계보를 모아 엮은 책)와 충간공파 파보(派譜) 두 가지로 된 일곱 권의 족보는 지금도 할아버지가 생각나면 가끔 꺼내 뒤적이곤 하는데, 그때마다 나는 그 갈피 속에서 어쩌면 할아버지의 체취라도 맡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착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至今想起爷爷时,我还会翻出由世谱和忠肝功派派谱构成的七册族谱看一看。每当这时候,我常常沉浸在茫然的错觉中,好像从书页中闻到了爷爷的气息。

할아버지는 무슨 보학(譜學, 계보에 관한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거나 뼈를 자랑하는 고리타분한 취미로서 족보를 받들어 모신 것이 아니었던 듯하다.
爷爷似乎并不是因为在谱系学方面有什么造诣,或者为了夸耀血统一类腐朽的兴趣才珍藏族谱。

청백리(淸白吏)가 속출한 것은 아니지만 줄곧 사대부(士大夫)의 가문이었다가 당신대에서 그치고 한갓 유생(儒生)에 머물러 선대의 뒤를 못 댄 한(恨)으로 그랬으리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대부 가문의 후예라는 기개만은 대단한 것이었고 평생을 자랑으로 알며 살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可能是因为虽然祖上没有辈出太多的清官廉吏,却一直是士大夫家门,但是到了他那一代都结束了,落迫为一介儒生而已。因为这种未能继承先贤的恨,才使他格外珍藏族谱。然而事实上,爷爷作为士大夫家门的后人,令他一生引以为豪,气魄一直很张扬。

할아버지는 구십 평생 망건이나 탕건은 물론 오뉴월 삼복에도 버선 한 번을 벗지 않았다. 어머니가 시아버님 두려워 농촌에선 더없이 편리한 작업복인 몸빼라는 것이 고쟁이 같대서 못 입어 보고, 옹점이가 끝내 단발 머리를 못 해본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다. 윗물이 맑아 아래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나 할까.
爷爷一直到90岁,一辈子不仅从未摘下过挽发髻的网巾和纱冠,阴历五、六月的三伏天也从来没脱过布袜。妈妈因为怕爷爷,所以连农村干活时特别方便的贴身劳动裤也没穿过。瓮点儿从没剪过短发也是因为怕爷爷。或许是上梁正下梁不歪的道理吧。

할아버지의 자(字)는 긍우(肯宇), 호를 능하(陵河)라 했으며, 병오(丙午)생으로 상주 목사(尙州牧使)의 아들이요, 강릉 부사〔강릉 대도호 부사(江陵大都護府使)〕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러나 과거(科擧)는 스스로 포기했다고 했다. 그 즈음엔 이미 선조들이 모두 벼슬살이를 반납하고 낙향해 버린 뒤였고, 공부를 중단해야 할 만큼 의기(意氣)와 가산이 침체돼 그럭저럭 실기(失期)해 버리고 만 것이라 했다.
爷爷字肯宇,号陵河,丙午年作为尚州牧使的儿子和江陵大都护府使的孙子出生。他自己放弃了科举,因为当时长辈们纷纷弃官告老还乡,家道开始没落甚至达到了要终断学业的程度,他失去了参加科举的机会。

 词 汇 学 习

의기:意气。

승전을 하여 모두들 의기충천하다.
打了胜仗,大家士气高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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