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의 배경/무오사화/갑자사화/중종반정과 기묘사화/을사사화/사화의 원인과 영향

사화는 신구 관료 세력 사이에 번진 정권 다툼으로, 많은 관료들이 참혹한 화를 입었다. 그 가운데 특히 신진 관료들이 많은 화를 입었다.

[사화의 배경]

성종 때부터 시작된 신(사림파)·구(훈구파) 관료 세력의 대립은 연산군의 거듭되는 실정을 계기로 일어난 무오사화·갑자사화에 이어 중종 대에 일어난 기묘사화와 명종 대의 을사사화 등 네 차례의 사화로 폭발하였다.

[무오사화]

1. 사화의 원인
(1) 무오사화는 1498년(연산군 4년)에 일어났는데,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사초의 일부가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이보다 오래전부터 있어 온 신구 세력의 대립에서 찾을 수 있다.
(2)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 일파가 성종 때부터 중앙에 올라와 벼슬을 하게 되자, 그때까지 중앙에서 기반을 굳히고 있던 훈구파와의 사이에 심한 대립이 생겼다.

2. 사화의 경과
(1) 연산군 4년에 《성종실록》이 편찬되기 시작하자 훈구파는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방한 것이라 하여 사림파를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김일손, 정여창 등 수많은 사림파 학자들이 역적으로 몰려 죽거나 귀양을 갔다.
(2) 무오사화의 결과로 훈구파들이 모든 중요한 관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갑자사화] 

1. 사화의 원인
연산군의 생모 윤비가 폐위되어 죽을 때 연산군은 네 살의 어린 나이로 아무것도 몰랐다. 그런데 즉위 후 10년 만에 임사홍 등의 밀고로 생모가 폐위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2. 사화의 경과
연산군은 생모 폐비에 관련된 성종의 두 후궁을 죽이고 그들의 소생인 왕자들마저도 없앴다. 연산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일에 관련되었던 무고한 선비들을 모조리 죄인으로 몰아 윤필상, 김굉필, 이극균, 권주 등 수십 명을 죽였다. 이미 죽은 한명회, 정여창 등은 무덤을 파헤치는 등 끔찍한 사건을 일으켰는데 이것을 갑자사화(1504년)라고 한다.

[중종반정과 기묘사화]

1. 중종반정과 사림의 등용
(1)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되자 드디어 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은 쫓겨나고 중종이 왕위에 올랐다. 새로 임금이 된 중종은 연산군 때의 두 사화로 화를 입은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사림파를 등용해 새로운 기풍을 불러일으키려 하였다.
(2) 중종에 의해 등용된 사람들이 영남의 사림파 학자 조광조를 비롯해 김안국, 김정, 김식 등이다. 이들 젊은 학자들은 김종직과 김굉필로 이어지는 학통의 사람들로 성리학 연구와 실천에 힘써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2. 조광조의 개혁 정치
학식이 높고 성품이 곧은 조광조는 유교 사상에 입각한 이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였다.
(1) 미신을 타파하고 각 지방에 상호 부조를 바탕으로 하는 향약이라는 자치 제도를 널리 시행하도록 하였다.
(2) 부패한 관리들을 과감히 몰아내고, 초야에 묻혀 있는 인재를 찾기 위해 현량과를 만들어 인재들과 신진 사림을 많이 등용하였다.
(3) 중종반정의 공신들 중에서 자격이 없는 자들을 추려 공적을 깎아내리고 그들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3. 기묘사화의 발생
(1) 조광조의 개혁 정치는 제대로 이상을 펴 보지도 못한 채 꺾이고 말았다. 조광조 등 개혁파에 의해 세력이 약해진 훈구파들이 이들을 몰아내기 위한 적극적인 공세를 폈기 때문이다.
(2) 1519년(중종 14년)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인하여, 조광조 등 수많은 영남 사림파 출신 관리들은 거의 다 화를 입고 사형을 당하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을사사화]

1. 사화의 원인
1545년(명종 원년)에 인종과 명종의 외척인 윤임과 윤원형 사이에 정권 다툼이 일어났다. 이들 왕의 외척 사이에는 중종 재위 당시에 이미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대립과 알력이 있었다.

2. 사화의 경과
(1) 중종의 뒤를 이어 인종이 즉위하자, 권력을 잡은 윤임 일파는 윤원형 일파를 몰아냈다. 인종은 사림파의 학자들을 중요하기도 했지만, 재위 1년도 못 되어 죽고 명종이 즉위하였다.
(2) 명종의 즉위로 세력을 얻은 윤원형은 윤임 일파를 몰아냈는데, 이로 인해 또 다시 많은 선비들이 억울하게 죽거나 귀양을 갔다. 이 사건을 을사사화라고 한다.

[사화의 원인과 영향]

1. 사화의 원인
네 차례의 사화는 조정의 관리들이 파를 이루어 정치적인 다툼을 벌인 결과로 일어났지만, 그 뒤에는 언제나 토지의 획득을 둘러싼 경제적 이해 관계가 얽혀 있었다.

2. 사회의 영향
사화의 영향은 결국 인재의 손실과 정치적인 문란은 물론 토지 제도의 파탄을 가져왔고, 백성들에 대한 지방관의 착취를 가속화시켰다. 결국 전세와 군역의 지나친 부담으로 인해 유랑민이 속출하면서 농촌 사회가 무너지고, 국가 전체가 분열로 치닫는 혼란을 맞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