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싹트는 평화 공존의 기운] 미소 양 진영 간의 냉전은 세계를 공산화시키려는 소련의 야욕에서 비롯하였다. 그러나 북대서양 동맹의 결성, 한국 전쟁 때 유엔군의 파견 …

[싹트는 평화 공존의 기운] 미소 양 진영 간의 냉전은 세계를 공산화시키려는 소련의 야욕에서 비롯하였다. 그러나 북대서양 동맹의 결성, 한국 전쟁 때 유엔군의 파견 등 자유 진영이 단결하여 이에 대항하자 소련은 평화 공존의 길을 찾아야 했다. 한편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도 나날이 증가하는 '핵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산 진영과의 타협을 꾀하였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1953년의 한국 휴전을 계기로 싹터 이듬해 4월에 한국의 통일과 인도차이나 휴전을 협의하기 위한 제네바 회의가 열렸으며, 1955년 5월에는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4개국이 그동안 분할 통치해 오던 오스트리아를 중립국으로 독립시켰다.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평화 운동의 영향 등으로 평화 공존의 기운은 그 후 한층 더 고조되었다.

[대립과 긴장 속의 평화 유지] 이러한 속에서 국제 긴장을 악화시키는 사태가 가끔 벌어졌다. 1959년에는 제2차 베를린 위기가 발생하였고, 미국 대통령 케네디와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의 빈 회담에서도 베를린 문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특히 1962년의 쿠바 위기 때에는 핵 전쟁의 위험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미소 간의 교섭이 활발해져 다음 해 7월에는 미국·영국·소련 3국 사이에 부분적 핵 실험 금지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처럼 미소 양국은 대립과 긴장을 계속하면서도 평화 유지를 위해 노력해 나갔다.
 
[쿠바 위기] 1962년에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는 일로 미국과 대립한 사건이다. 쿠바는 소련과 무기 원조 협정을 맺고 미사일 기지 건설에 착수하였다. 이를 탐지한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에 대하여 미사일 기지 건설 중지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는 이를 거부하고 미사일을 실은 배를 쿠바로 보냈다. 이리하여 미소는 핵 전쟁 위기까지 갔으나, 소련이 태도를 바꾸어 양보함으로써 핵 전쟁의 위기를 모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