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독립 선언의 영향/여러 갈래의 독립 운동과 일원화 추진/민족 대표의 선정/고종의 죽음과 거사일 변경/독립 선언과 시가 행진

[2∙8 독립 선언의 영향]

일본 유학생들이 도쿄에서 2·8 독립 선언을 추진하고 있을 때 국내에서도 여러 방면에서 독립 운동이 계획되고 있었다. 손병희와 최린, 권동진, 오세창 등이 1919년 1월부터 독립 운동에 대해 본격적으로 협의하였다. 특히 도쿄 유학생의 독립 선언 계획을 들은 손병희는 "어린 사람들이 저렇게 민족을 위하여 운동을 한다니 우리로서 어찌 앉아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여러 갈래의 독립 운동과 일원화 추진]

1. 교육 기관
중앙 학교 교장 송진우와 교사 현상윤 등은 독립 운동에 대한 협의를 하면서 최린과 연락을 취하였다.
2. 종교 단체
이승훈을 중심으로 한 평양의 기독교인들도 독립 운동을 계획하고 숭실 전문학교를 비롯한 기독교계 학생의 시위 운동을 준비하였으며, 박희도를 중심으로 한 서울의 기독교 학생들도 독립 선언을 준비하고 있었다.

3. 일원화 추진
여러 갈래로 추진되던 국내의 독립 운동은 천도교 측이 제안한 독립 운동의 일원화에 기독교·불교 등의 종교 대표와 학생 대표가 호응하고 가담함으로써 가속화되었다.

[민족 대표의 선정] 

독립 운동 계획에 따라 먼저 민족 대표 33인이 선정되어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이 33인 외에 3·1 운동의 계획과 실천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가운데 개인 사정과 다음 단계의 투쟁을 위해 서명에서 빠진 사람이 16명이 있었다. 이들까지 합친다면 실제 민족 대표는 49인이었다. 독립 선언서는 최남선이 기초해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 인쇄소에서 인쇄하였다.

[고종의 죽음과 거사일 변경]

1. 고종의 죽음
이 무렵 국내에서는 국민들의 반일 감정을 폭발시킨 큰 사건이 일어났다. 연금 상태에 있던 고종이 갑자기 죽은 것이다. 고종은 건강이 비교적 좋은 편이었으므로 일본인에 의한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일제에 대한 국민들의 적개심과 증오도 날로 커졌다. 남녀 학생들은 검은 상장을 달고 동맹 휴학을 하였고, 상가는 문을 닫았으며,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었다.

2. 거사일의 변경
고종의 죽음은 독립 운동에 불을 댕겼고, 인산일(왕의 장례식 날)인 3월 3일은 각 지방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들 것이어서 거사하기에 꼭 좋은 날이었다. 따라서 본래 독립 만세 운동은 3월 3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장례를 치르는 날이라 불경하다 하여 3월 1일로 앞당겼다.

[독립 선언과 시가 행진]

1. 민족 대표들의 독립 선언
1919년 3월1일 민족 대표들은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한용운의 선창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제창하면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독립 선언서는 조선 총독, 일본 정부, 일본 의회, 윌슨 미국 대통령, 파리 강화 회의의 각국 대표들에게도 전달되었다.

2. 독립 선언서 낭독과 시가행진 
민족 대표들이 독립 선언을 외치던 시간에 탑골 공원에서는 정재용이 각급 학교 학생과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에 학생들과 시민들이 잇따라 만세를 부르면서 종로 쪽으로 시가행진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