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吉是统一新罗末期一位发动起义的人之一,在全国草寇势力抬头时,带领起了北原的势力,在江原道一带称霸一方。可后来被弓裔偷袭而归于弓裔麾下。

집권적인 지배체제가 서서히 무너지던 신라 말기에 중앙 지배층 내부에서는 권력쟁탈전이 끊이지 않는 한편, 지방에서는 지배층의 수탈과 빈번한 자연재해로 인하여 농민들이 농토에서 유리되어 '초적'이 되고, 일부 야심가들은 그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集权的统治体制渐渐没落的统一新罗末期,一边是中央统治阶级内部不断的权力斗争,另一边是地方统治阶级的掠夺以及频繁自然灾害,导致农民离开土地,成为所谓的“草寇”,而一部野心家就利用这些流民来壮大自己的势力。

889년(진성여왕 3) 정부재정이 궁핍해져서 지방에 조세를 독촉하자 전국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889年(真圣女王3年)政府财政穷乏,不断催促地方税收,于是在全国“盗贼”就像一窝蜂似的出现了。

이때 양길은 북원(지금의 원주)에서 큰 세력을 갖고 활동하고 있었다.
这时候,梁吉在北原(现在江原道原州)活动,不断壮大自己的势力。

892년 죽주(지금의 죽산)에 웅거한 기훤의 휘하에 있던 궁예가 양길에게 의탁하게 되었다.
892年盘踞在竹州(现在的竹山)箕萱麾下的弓裔依托于梁吉之上。

양길은 궁예를 잘 대우하여 일을 맡겼고, 100여 기를 주어 북원 동쪽의 마을과 명주(지금의 강릉) 관내인 동해안의 10여 군현을 공격하게도 했다.
梁吉也很到地对待了弓裔,把要事交付给弓裔,给他100余骑士兵,让他去攻打北原东边的村落以及溟州(现在的江陵)关内东海岸10多个郡县。

그러나 궁예가 여러 지방을 공격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다져 그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자 899년(효공왕 3) 국원(지금의 충주)을 비롯한 30여 성의 강병을 이끌고 궁예를 치려 했다.
可是弓裔一边攻打着这些地方,一边巩固自己的势力,成为了对梁吉有威胁的存在。于是899年(孝恭王3年)梁吉从国原(现在的忠州)开始带领着30多个城的强兵,打算去打击弓裔。

비뇌성(非惱城) 아래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그의 습격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궁예가 선제공격에 나섰기 때문에 크게 패하고 말았다.
双方在非恼城下交战,但已经知道梁吉要偷袭他,所以弓裔采取行动,更先一步攻打梁吉,于是梁吉大败。

이후 충청도 지역은 대부분 궁예의 세력권이 되었고, 양길의 세력은 차츰 쇠퇴한 듯하다.
此后,忠清道地区大部分都成了弓裔的势力范围,而梁吉的势力却逐渐衰退。

〈삼국사기〉 궁예열전과 신라본기에 나타난 양길의 활동연도와 내용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三国史记·弓裔列传》和《三国史记·新罗本纪》中对梁吉的活动年份和内容都有些许不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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