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주크투르크의 위협] 교황의 권위가 높아진 11세기는 봉건 제도의 기초 위에 서유럽 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든 시대였다. 농업 생산의 증가로 상업이 발달하고 이에 따라…

[셀주크투르크의 위협] 교황의 권위가 높아진 11세기는 봉건 제도의 기초 위에 서유럽 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든 시대였다. 농업 생산의 증가로 상업이 발달하고 이에 따라 각지에 새로운 도시가 생겨났다. 크리스트교도들은 예수의 무덤이 있는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크리스트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은 7세기 이래 이슬람 세력의 지배하에 있었다. 따라서 11세기 후반에는 이슬람교도인 셀주크투르크 족이 소아시아에까지 진출하여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는 한편 크리스트교도의 성지 순례를 방해하였다. 이때 셀주크투르크에게 수도 콘스탄티노플까지 위협받게 된 동로마 황제는 로마 교황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십자군 운동의 시작] 당시의 교황 우르반 2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동로마 제국에까지 교세를 확장하고자 1095년에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하고 동로마 제국에 대한 지원과 이교도로부터의 성지 탈환을 호소하였다. 이에 감동한 각국의 제후와 기사들이 일제히 호응함으로써 십자군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1096년부터 13세기 후반까지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원정이 여러 차례 거듭되었다.

[십자군 운동의 또 다른 원인] 십자군 운동이 이렇게 오랫동안 대규모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서유럽인들의 열렬한 신앙심에 일차적 원인이 있었지만 봉건 제도하에 사회가 안정되면서 경제적 발전과 함께 밖으로의 진출 의욕이 강하게 작용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특히 이탈리아의 상인들은 십자군을 이용하여 동방 무역의 확대를 꾀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