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난 이유/국채 보상 운동의 전개/일제의 탄압/의의

한말의 애국 운동 가운데 경제 자립 운동의 하나로 추진된 것이 일본에 진 빚을 갚아 자주성을 회복하자는 국채 보상 운동이다.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난 이유]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한 후, 대한 제국으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1,300만 원의 차관을 들여 오도록 했다.  근대화를 위한 사업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높은 이자로 빚을 쓰도록 해 장차 한국의 경제를 지배하려고 한 것이다. 일제의 이 같은 속셈을 알아차린 국민들은 일제의 강제로 인해 진 빚을 국민의 힘으로 갚아 국가 경제의 자주적 지위를 다지고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국채 보상 운동을 전개하였다.

[국채 보상 운동의 전개]

1907년 대구에서부터 시작된 국채 보상 운동은 각 지방으로 퍼져 나가 많은 사람들이 담배와 술을 끊어 성금을 내고, 부녀자들은 반지, 목걸이 등 패물을 내어 성금을 모았다. 또 <황성신문>, <만세보>, <제국신문> 등 언론 기관도 크게 호응하였다. 

[일제의 탄압] 

국채 보상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는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통감부는 <대한매일신보>가 보관하고 있던 성금을 양기탁이 마음대로 사용하였다는 구실을 붙여 그를 구속하였다. 결국 양기탁은 무죄로 석방되었으나 일제의 계속되는 방해로 국채 보상 운동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였다.

[의의]

국채 보상 운동은 일제의 방해로 결국 실패하였지만, 나라를 구하려는 우리 민족의 강렬하고 자발적인 애국정신이 총체적으로 발휘된 구국 운동이었다. 특히 지역과 남녀의 구별 없이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