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果曾经看过刘亚仁和宋康昊主演的韩国电影《思悼》,那么就会大致了解这个韩国历史人物的悲剧人生。虽说在古代的中国和韩国都曾经发生过无数父子相残、兄弟相残的人伦惨剧。但思悼世子的悲剧还是会让每个看过电影的人感慨万千,或许真的就只能以“政治之下无父子”这句话概之吧。

思悼世子的出生背景:

사도세자는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의 두 번째 왕자로 이름은 이선(李愃),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다. 잘 알 듯이 영조는 조선의 국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고 재위했다(각 82세, 52년). 영조는 정성(貞聖)왕후(1692∼1757)ㆍ정순(貞純)왕후(1745~1805) 등 왕비 2명과 정빈(靖嬪) 이씨(1694~1721)ㆍ영빈(暎嬪) 이씨(1696~1764)ㆍ귀인 조씨ㆍ후궁 문씨 등 후궁 4명을 두었다. 왕비에게서는 후사를 보지 못했고, 후궁에게서만 2남 12녀를 두었다(그 중 5녀는 일찍 사망했다).
思悼世子是朝鲜第21代国王英祖的第二位王子,名李愃,字允寬,号毅齋。正如大家所知,英祖是朝鲜活得最久、在位最久的国王(享年82岁,在位52年)。英祖有贞圣王后、贞纯王后两位王妃,还有靖嫔李氏、暎嫔李氏以及贵人赵氏、后宫文氏等后宫四人。两位王妃没有子嗣,只有后宫嫔妃生下了2子12女(其中5女早夭)。

첫 아들인 효장(孝章)세자는 즉위하기 전 정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지만(숙종 45년(1719) 2월 15일) 9세로 요절했다(영조 4년(1728) 11월 16일). 둘째이자 마지막 아들인 사도세자는 그 7년 뒤에 태어났다(영조 11년(1735) 1월 21일).
英祖的第一个儿子孝章世子是英祖即位前和靖嫔李氏所生,但该子在9岁夭折。英祖的第二子,也是最后一个儿子—思悼世子在7年后出生。

그때 영조는 41세로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였다. 국왕의 기쁨은 당연히 매우 컸다. 그는 “삼종의 혈맥이 끊어지려고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돌아가서 여러 성조(聖祖)를 뵐 면목이 서게 되었다. ”고 말했다.
当时,英祖年纪不小已经41岁。英祖中年得子自然是十分高兴。他曾说:“三宗的血缘原本就要断绝了,如今能够延续下去,就是百年后也能有脸面去见各位圣祖了。”

그런 기쁜 마음은 즉각적인 조처로 반영되었다. 영조는 즉시 왕자를 중전의 양자로 들이고 원자로 삼았으며, 이듬해에는 왕세자로 책봉했다(영조 12년 3월 15일). 원자 정호(定號)와 세자 책봉 모두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빠른 기록이었다.
英祖的欣喜反映在他即刻颁布的御令之中。英祖立即将王子立为中殿的养子,当成元子(原配嫡子)抚养。第二年册封他为王世子,立为元子和册封世子的速度在朝鲜王朝的历史上都是最快的。

그 결과의 참혹함은 특별했지만,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도 처음부터 그렇게 긴장한 것 아니였다. 처음에는 재능과 총애가 넘쳤지만, 점차 서로의 생각이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귀결된 것이다.
思悼世子结局的残酷虽然很特别,但思悼世子和英祖的关系也不是从一开始就那么紧张的。思悼世子开始也是很有才华,备受英祖宠爱,之后两人的想法逐渐相逆,结果才造成了无法逆转的悲剧。

그런 과정을 간략하지만 포괄적으로 서술한 자료는 영조 38년(1762) 윤5월 13일, 세자가 처벌되던 날의 기록이다. 거기서는 “세자의 천품과 자질이 탁월해 임금이 매우 사랑했는데, 10여 세 뒤부터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청정한 뒤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天性)을 잃었다”고 지적했다. 이미 여러 연구들이 분석한대로 이 기록은 대체로 믿을 만하다고 판단된다.
虽然简略了那些过程,但大致叙述了当时情况的资料是英祖38年(1762年)闰5月13日,世子被处罚当天的记录。记录上记载着“世子的天资和资质,开始极得君主喜爱,然而从10多岁开始,世子逐渐对学习懈怠起来,自代理听政后患病,丧失了天性”。根据多方研究分析,得出这份记录大体是能够相信的资料。

思悼世子的简略生平:

集帝王的宠爱和王室的期待于一身的思悼世子的成长过程很顺利。根据史料可知世子自小就很聪明,满2岁就能识字,也很早熟。他看到千字文(천자문)上“奢侈(사치)的‘侈’字”后就指着自己身上的短袖衣服和紫色绸缎(비단)制成,镶着珠子的边说:“这就是奢侈的东西”后,立即就把衣服脱掉了。

世子8岁时得过麻疹,行冠礼(관례)后就和当时正九品的洗马洪凤汉通水的女儿洪氏成婚。世子和洪氏成婚后7年才生了第一个儿子懿昭世孙,但这个孩子却在两年后夭折,而同年又生了第二个儿子。这个孩子在24年后继位,成为朝鲜时代代表的贤君正祖。

思悼世子虽然很聪明,但却具有强烈的武人气质(무인적 기질)。据说世子自小就爱玩行军打仗的游戏,喜读兵书和谋略。身体很健壮,武艺也不俗。孝宗曾经使用过的青龙刀和铁棒就连普通武夫也难以提起,而世子15、16岁时就能提起并挥洒自如。因此世子对朝鲜的国防(국방)国际情势(국제정세)的认识也表现得相当积极。作为父亲的英祖自然也深知儿子的这一气质,因此在世子8岁时就任命刑曹判书李宗城为世子的宾客,拜托他教导性格强韧的世子仁心。

世子尚武,自然逐渐就会怠于(태만하다)做学问了。根据史料,世子大约是在10岁左右开始讨厌学问。而期望世子担起江山社稷的英祖对此自然是多有不满。英祖以自身严谨的治学态度要求性格豪放的世子,多次指责(꾸짖다)世子,导致世子开始疏远和害怕英祖。

此后,世子和英祖两人的关系随着世子开始代理听政(대리청정)而渐行渐远。世子14岁就开始在英祖的要求下代理听政。对于近现代的王政而言,代理听政既是机会,又是危机。如果世子能代替君主处理好政务,能力得到承认就能够稳固地位,如果世子不能处理好就会丧失帝王的信任,甚至失去资格(실격)。然而英祖让世子代理听政多是出于好意(호의적이다),是为了让世子能够在即位前得到锻炼,性情也能经此有所调整。然而可以预想到,其过程并不顺利。英祖也自此对世子处理政务的能力和修养更为不满。

英祖为了巩固王权,观察臣子是否忠诚也像许多先祖一样做出了“让位(양위)”的举动。而臣子们明知帝王实际上并没有“让位”的意思,但却不得不用尽全力去请帝王收回成命。而世子在英祖做出这种政治性举动时总会很紧张和害怕,多次跪求英祖收回成命。

英祖的举措让世子的压力越来越大,英祖也将对世子的不满发泄出来,两人的矛盾逐渐升级。世子对英祖的惧怕也在英祖反复让位中达到新高,据说他在得到进见的命令就害怕得发抖,即使是很简单的问题也没办法立即做出应答,甚至曾在面见英祖后昏死过去。世子对英祖的惧怕成了心理病,他因为不想去见英祖,甚至还讨厌穿衣服。

壬午禍变(임오화변)(英祖38年闰5月,世子被关进柜中死去的事件)当日的记录中也曾提及“丁丑年、戊寅年后,世子病情越发严重,发作时会杀死宫婢和内侍,之后又常后悔。帝王每次都会下诏申斥,世子害怕所以病情愈加严重”。

由于当时支持少论(소론)的世子和在朝中占多数的老论(노론)党派臣子产生过不少冲突,所以后世也有人主张世子是当时朝鲜党政(당쟁)的牺牲品。

壬午禍变爆发的直接契机是罗景彦告发世子的腐败被判诬告而被斩首,然而罗景彦的告发让英祖对世子私下的事更为清楚,对世子失望到了极点。最终在闰5月13日,英祖将世子废为庶人并关入(뒤주)中。据史料记载,思悼世子被禁于其中9日后死亡。

韩国年度虐心电影《思悼》名台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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