韩国首尔的“狎鸥亭”是首尔江南富人区中的繁华区,不仅有钱人集中在这里,而且还经常有很多明星出入,去韩国旅游的时候也是不能不去的重要景点之一。

강남문화의 1번지, 부자들이 사는 대표적인 동네 등의 의미를 가지는 말 중에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장 먼저 떠올리는 지역을 든다면 단연 서울의 압구정동일 것이다. 지금의 동호대교의 남쪽 일대를 일컫는 말인 압구정동은 조선시대 이곳에 있었던 별장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要说出江南文化的第一号、富人们居住的代表区域的话估计韩国人都会第一时间想到首尔的狎鸥亭。狎鸥亭洞是指东湖大桥以南的一带,狎鸥亭的名字是取自朝鲜时代这个地方的一幢别墅的名字。

그 별장의 이름이 바로 압구정인데, 조선시대에 서울에서 가장 크고 화려함을 자랑하는 별장이었다는 기록이 왕조실록에 전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고 지명으로만 남아서 부(富)의 상징으로 뜻이 바뀌어 있는 상태다.
这个别墅的名字就叫“狎鸥亭”,《朝鲜王朝实录》中记载,这是朝鲜时代首尔地区最大最豪华的住宅,现在这个住宅已经找不到任何痕迹了,只是留下这个“狎鸥亭”这个名字作为“富”的象征。

겸재 정선이 그린 압구정도(간송미술관 소장) 朝鲜时代画家郑敾画的狎鸥亭图(涧松美术馆收藏)

압구정이란 정자 혹은 별장을 지은 사람은 조선전기 세조 때의 문인으로 수양대군이 권력을 잡게 된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사건인 계유정난을 일으킨 중심인물이면서,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을 좌절시켜서 세조의 왕권을 더욱 탄탄하게 해준 장본인인 한명회(韓明澮)였다.
建造“狎鸥亭”这个亭子或者说别墅的人叫做韩明浍,是朝鲜前期始祖的文臣,首阳大君夺得权力的癸酉靖难事件中的重要人物,他还领导挫败了死六臣的端宗复辟运动,巩固了世祖的王权。

한명회가 얼마나 권세를 부렸는지는 성종실록을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압구정을 지은 후 그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압구정을 찬양하는 시를 지어 바치라고 했으며, 중국 사신이 오기만 하면 반드시 그곳에 초청해서 접대를 하곤 했는데, 어느 때인가 잔치를 할 때는 국왕만 쓰게 되어 있는 용봉(龍鳳)차일을 성종의 허락도 없이 몰래 가져다 쓸 정도로 안하무인이었다고 한다.
从《朝鲜王朝实录》中可以看出韩明浍当时具有很大的权势,狎鸥亭建造完成后,他让很多人写了歌颂狎鸥亭的诗,中国使臣来的话也一定会在那里进行招待,有一次举办宴席的时候还未经成宗同意就用只有国王才能用的龙凤图案遮阳布。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으니 이름의 끝에 亭이라는 글자를 붙어 있는 것만 보면 압구정은 별로 크지 않는 아담한 정자 정도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림으로 남아있는 자료를 토대로 해서 볼 때 이것은 정자라기보다는 화려한 별장에 해당되는 루(樓)나 각(閣) 정도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但是有趣的地方在于,从“狎鸥亭”的“亭”字人们很容易把它想成是一个雅致的亭子而已,但是从流传下来的资料中可以看出,它是规模相当于别墅的楼阁。

한명회는 이 압구정을 매우 사랑해서 이것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기 때문에 권력의 자리에 있을 때도, 권력의 자리에서 떠나 있을 때도 늘 압구정에서 거처를 옮기지 않았으며, 73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줄곧 이곳에서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만약 죽은 한명회가 지금의 압구정 문화현상을 보았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는 잘 추측이 되지 않는다.
韩明浍非常喜爱狎鸥亭,对这个地方有非常大的自负心,因此他一直住在这个地方,直到73岁逝世。如果韩明浍看到现代狎鸥亭的文化现象,不知会作何感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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