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 우리 민족은 독립을 위한 줄기찬 투쟁과 노력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고, 2차 세계 대전 중에도 연합국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미리 약속하기…

[8·15 광복]

우리 민족은 독립을 위한 줄기찬 투쟁과 노력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고, 2차 세계 대전 중에도 연합국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미리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연합군의 승리로 일본이 패망하자, 우리나라는 35년간의 일본 침략에서 벗어나 1945년 8월 15일에 광복을 맞이하였다.

[군정과 남북 분단]

8·15 광복의 기쁨도 잠시,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 미국과 옛 소련이 북위 38도 선을 경계로 남북에 각각 진주함으로써 남북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광복과 더불어 독립된 나라를 세우려던 우리 겨레는 억울하게도 국토의 분단을 감수해야 했다. 그리고 미국과 옛 소련의 냉전이 더욱 심해지자 국내의 정치 세력도 좌우로 나뉘어 통일된 정부를 세울 수 없게 되었다. 또 북한에서는 옛 소련의 군정 아래 공산주의자들이 세력을 길러 뒷날의 공산 독재 정치의 기초를 닦기에 분주하였고, 남한에서는 미국의 군정 아래 여러 정당의 정치 세력이 생겨나 정치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서로 다투어 나라 안이 어지러웠다.

[신탁 통치 반대]

1945년 광복되던 해 12월에 미국·영국·옛 소련의 세 나라 외상이 옛 소련의 모스크바에 모여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가 바로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이다. 이 회의에서는 한국을 독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치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길 때까지 앞으로 5년간 미국·영국·중국·옛 소련이 맡아서 대신 나라를 다스린다는, 이른바 신탁 통치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또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의 해결을 위해 미·소 공동 위원회를 열기로 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우리 민족은 신탁 통치를 절대 반대하였다. 공산주의자들도 처음에는 우리와 같이 신탁 통치를 반대하였으나, 얼마 후 돌연 뜻을 바꾸어 신탁 통치에 찬성하고 나섰다. 그러자 서로 다툼이 일어나고, 마침내 나라 안이 온통 어수선해졌다.

[미∙소 공동 위원회]

이듬해인 1946년에 신탁 통치 문제와 한국 임시 정부 수립을 협의하기 위해 서울의 덕수궁에서 미∙소 공동 위원회가 두 차례 열렸다. 그러나 옛 소련의 고집으로 결실을 보지 못하고, 한국 문제를 국제 연합(UN)에서 다루기로 하였다. 이에 국제 연합 총회는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을 우리나라에 파견해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이러한 유엔의 결정을 무시하고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북한 지역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해 부득이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

[정부 수립]

우리나라는 국제 연합의 감시 아래 1948년 5월 10일, 선거가 가능한 남한 지역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이것이 광복 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5·10 총선거이다. 이 선거로 선출된 198명의 국회의원은 제헌 국회를 열고, 대통령 중심제와 단원제를 채택한 헌법을 제정해 그 해 7월 17일에 공포하였다. 곧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고, 주권이 모든 국민에게 있는 민주 공화국을 탄생시켰다. 또 국회의 간접 선거를 통해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뽑고, 이어 정부 조직을 편성해 1948년 8월 15일 광복 3년 만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리고 국제 연합은 대한민국을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