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 쏠리는 열강의 관심] 19세기 후반에 강대국 간의 대외 정책은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으로 변하여 갔다. 이로 인해 문명이 뒤떨어진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프리카에 쏠리는 열강의 관심] 19세기 후반에 강대국 간의 대외 정책은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으로 변하여 갔다. 이로 인해 문명이 뒤떨어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대부분 지역은 유럽 강대국의 식민지 대상이 되었다. 아프리카 대륙은 19세기 중엽까지도 북쪽 해안과 남쪽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유럽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아프리카 탐험으로 아프리카 내륙 지방의 깊숙한 곳까지 세상에 알려지면서 유럽 열강의 관심이 아프리카로 쏠리게 되었다.

[영국의 아프리카 종단 정책]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진출의 시초가 된 것은 1869년에 완성된 수에즈 운하였다. 이집트가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하여 수에즈 운하를 외국에 양도하려고 하자, 영국은 곧 이 운하를 사들이고 이집트의 내정까지 간섭하였다. 또한 영국은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삼고 남쪽의 수단에 진출하여 아프리카 종단 정책을 추진하였다.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 정책] 프랑스도 1830년부터 알제리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를 발판으로 지배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1881년에 튀르크령 튀니지를 보호국으로 삼은 데 이어, 사하라 사막을 점령하고 여기서 다시 수단을 거쳐 동쪽의 마다가스카르 섬을 연결시키는 아프리카 횡단 정책을 추진하였다.

[영국와 프랑스의 충돌] 영국의 종단 정책과 프랑스의 횡단 정책이 수단 남부의 파쇼다에서 충돌하였다. 이를 파쇼다 사건(1898년)이라 하는데, 프랑스의 양보로 수단은 영국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이 사건이 있은 이듬해에 영국은 보어 전쟁(1899~1902년)을 일으켜 케이프 식민지와 그 북쪽의 여러 지역을 합친 남아프리카 연방을 탄생시켰다.

[독일의 식민지 정책] 독일은 1884년 동아프리카와 서남아프리카 등지에 식민지를 만들어 나갔다. 그 후 프랑스의 모로코 지배에 대항하여 2회에 걸친 모로코 사건(1905년, 1911년)을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하였고, 모로코는 정식으로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었다. 

[기타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 이탈리아는 1885년에 에리트레아를 점령한 뒤 영국·프랑스와 함께 소말리아를 분할하였다. 그 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을 일으켜 튀르크령인 트리폴리·키레나이카를 점령하고, 두 지역을 아울러 '리비아'라 하였다. 이와 같은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진출로 인해 20세기 초까지의 아프리카 대륙은 에티오피아 제국과 라이베리아 공화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열강에 분할되었다.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탐험] 리빙스턴은 1849년 남아프리카의 내륙 깊숙이 들어가 누가이 호·빅토리아 폭포 등을 발견하였다. 그 후 다시 아프리카 탐험 길에 나섰으나 행방이 묘연해져서 스탠리가 그를 구하러 떠났다. 스탠리는 탕가니카 호 부근에서 리빙스턴을 발견하고 리빙스턴의 뒤를 이어 탐험을 계속하여 콩고 강을 따라 대서양 연안에 이르렀다.

[모로코 사건]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 지배에 간섭하여 두 차례에 걸쳐 모로코 사건을 일으켰다. 제1차 모로코 사건은 1905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모로코를 방문하여 모로코의 영토 보전 및 문호 개방을 추진함으로써 프랑스와 대립한 사건이고, 제2차 모로코 사건은 1911년 독일이 모로코 내란을 구실로 군함을 모로코에 파견함으로써 또다시 프랑스에 도전한 사건이다. 그러나 두 차례 모두 영국이 프랑스를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독일의 의도는 실패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