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북방 정책/4군 6진의 설치/동북 지방 개척/세종 이후의 북방 정책

[세종의 북방 정책]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여진족의 침입과 소란은 계속되었다. 이에 세종은 조상들이 활동하던 옛 땅을 한 치라도 버려 둘 수 없다는 신념에서 적극적인 북방 개척 정책을 폈다.

[4군 6진의 설치] 

4군과 6진의 설치로 압록강, 두만강을 경계선으로 하는 오늘날의 우리 국토가 이루어졌다

1. 4군의 설치
세종 15년(1433)에 건주 여진족이 만주에 건주위를 설치하고 침입하자 최윤덕, 이천으로 하여금 여진족을 압록강 이북으로 내쫓게 하고, 그 땅에 여연, 자성, 우예, 무창 등 서북 4군을 설치하였다. 

2. 6진의 설치
4군 설치 이듬해부터 10여 년간 함길도 절제사 김종서로 하여금 동북면 지방인 종성, 회령, 온성, 경원, 부령, 경흥에 동북 6진을 설치하게 해 두만강까지 국경선을 확장하였다.

[동북 지방 개척]

세종은 4군과 6진의 설치에 그치지 않고 여러 해에 걸쳐 새로 개척한 동북 지방에 남쪽 사람들을 이주시켜 국토를 개발하는 정책을 썼다. 그리하여 한반도 전역을 우리 겨레의 실질적인 생활 무대로 확보하였다.

[세종 이후의 북방 정책]

1. 북방 정책 계승
 세종 이후에도 여진족이 자주 북쪽 국경을 넘나들어 한때 서북 4군을 철폐한 일도 있었지만, 이는 행정상의 일시적 변동일 뿐 결코 영토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2. 여진족의 침입과 정벌
세조 때인 1460년에는 신숙주가, 1467년에는 강순, 어유소, 남이 등이 대대적으로 야인(여진족)을 정벌하였다. 성종 때에도 윤필상, 허종 등이 야인의 침입을 격퇴하였고, 선조 때에도 여진족 추장 니탕개의 난이 일어났으나 역시 신립이 진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