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해산 이후 의병 활동의 변화/원주 진위대의 봉기/강화 분견대의 봉기/각지의 의병 활동

의병의 구국 항전은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의병 운동에서 의병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의병들은 우수한 최신 무기와 근대식 훈련을 받은 일본군과 대적하며 싸움을 계속하였다.

[군대 해산 이후 의병 활동의 변화]

해산당한 군인들도 의병에 가담하면서 의병 활동은 더욱더 조직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1. 군인들의 의병 합류
여러 곳에서 활동하던 의병 부대에 해산된 군대가 합류하면서 의병은 유생과 군인, 농민, 어민, 포수, 광부, 상인 등 국민 각 계층을 두루 아우르는 조직적인 군대로 재편되었다.

2. 장비와 전술 능력 향상
종래의 구식 총인 화승총보다 성능이 우수한 신식 장총도 일부 보유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더 전투적인 체제로 조직을 정비하고, 경험이 많고 훈련된 군인들이 가담함으로써 작전 능력도 훨씬 향상되었다. 이처럼 의병 활동은 군대 해산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원주 진위대의 봉기]

원주 진위대는 1907년 김덕제, 민긍호 등이 중심이 되어 원주 시민과 함께 봉기하였다. 이들은 우편 취급소, 군청과 경찰서를 습격해 무기고를 점령하고 총과 탄약을 확보하였다. 충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수비대가 이들을 공격하였으나,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을 물리쳤다. 그 뒤 서울에서 일본의 혼성 부대가 파견된다는 소식을 듣고 2개 부대로 나누어 민긍호가 이끄는 1개 부대는 충주, 제천, 죽산, 장호원, 여주, 홍천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김덕제가 이끄는 다른 한 부대는 강원도 동해안을 따라 평창, 강릉, 양양, 간성, 통천 방면으로 진출해 그 일대에서 항일전을 벌였다.

[강화 분견대의 봉기]

수원 진위대의 강화 분견대도 봉기하였다. 강화 분견대의 지홍윤, 유명규, 이동기 등은 일진회 회원인 군수 정경수와 일본인 경관을 처단하고 강화읍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여기에 강화 읍민들이 가담해 규모가 6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갑곶진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공방전을 벌여 일본군 10명을 사살하였으나, 곧 증강된 일본군을 피해 강화도를 탈출하였다. 그 뒤 경기도와 황해도 방면으로 흩어져 그곳 의병과 합류하였다. 이 밖에 홍주 분견대와 진주 진위대도 군대 해산에 대항해 의병에 가담하였다.

[각지의 의병 활동]

1. 충청도 지역
노병대는 김운노, 송창헌 등과 함께 충청도 속리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노병대 의병은 해산된 서울의 시위대 군인들이 중추적 구실을 하였으며, 보은과 상주, 청주, 성주, 거창 등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에서 활동하였다. 

2. 강원도 지역
강원도 원주에서는 이인영이 이구재, 이은찬, 방관일, 정대일 등과 함께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3. 경상도 지역
경상북도에서는 신돌석 부대가 강원도와 접경 지대에서 활동하였고, 정용기 부대는 동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4. 기타 지역
경기도 포천에서는 허위, 장안과 황해도 서흥 일대에서는 김수민이 활동하였다. 이밖에도 전라도에서는 고광순이 지리산, 이석용은 함평, 그리고 무주에는 문태수가 각각 봉기하였다. 그리고 함경도에서는 이정태과 차도선, 평안도에서는 박의석이 의병을 조직하여 활약하였다.